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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Apr 22. 2024

20년 늦은 사과

이십대의 나는 얼른 나이 들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시험을 준비하러 집에 내려와 있었던 1년 반이라는 시간은 재수를 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간 20대의 나에게 가장 힘든 낭인 시절이었다.

독서실에 돈을 쓰는 것조차 죄송해서 남의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하다 잠깐 낮잠을 잘 때면 ‘깨어나면 35살이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모든 시간이 끝나고 취직을 했든 결혼을 했든 결론이 나있을 테니까’라고 생각하며 팔 위에 머리를 얹고는 잠을 청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사람이 외부로부터 아무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내부에서 솟아나온 긍정의 힘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의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사람일까?”

그렇게 1년간 공부를 한 후 언론고시를 치고 결국은 다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상한 사고회로를 돌린 후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시험 시즌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서는 학교 근처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내 방은 세로는 침대 길이만 했고 가로는 침대와 책상 하나가 나란히 들어가는 너비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 양팔을 펼치면 방의 양쪽 벽에 닿을 판이었다. 벽은 있었지만 한 층은 하나의 공간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음악을 들어서도 안 되고 전화 통화는 물론 할 수 없고 알람을 끄지 않는 행위는 사형감이었다. 창이 없는 방은 21만원, 창이 있는 방은 24만원이었다. 시장경제가 정한 햇빛의 가격은 한 달 3만원인 셈이다. 나는 햇빛이 없는 방을 선택했다. 고시원을 얻고 나는 학교 앞 패스트푸드점에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멀쩡하게 대학을 졸업한 20대 젊은이는 뭐라도 해서 고시원 방값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과외 같은 시간당 페이가 좋은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나를 거칠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집은 대단히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학 학비와 생활비는 오롯이 대주셨다. 학교 앞 패스트푸드 점에서 나와 같이 일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내가 경험해보려고 했던 거친 형편의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 인천에서 매일 서울의 신촌까지 일하러 오는 고3 나이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고3이 아니라 고3 나이라고 말한 것은 그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분식점을 한다고 했는데 당시 압도적으로 쌌던 30일권을 한 번에 살 돈이 없어서 매일 편도 전철표를 끊어서 오는 아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배웠든 못 배웠든 간에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갖고 있었기에 그 아이에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주기도 하고 내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긍정적 피드백이라는 것을 그 아이에게 주었다. “너는 할 수 있다. 잘 하고 있다. 이런 걸 해봐. 저런 걸 해보면 어떨까?”

취준생들 대부분이 그렇듯 당시의 나는 ‘요즘 뭐해?’라는 질문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할 만한 사람들과는 일절 교류를 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그 당시 나는 그 패스트푸드점의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나의 꽉 막힌 현실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멘토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쩌다 한 번씩 이 아이들과 함께 밥이라도 먹는 자리가 생기면 그 밥값을 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선배나 친구를 만나는 자리였으면 1/N로 나눠 내거나 얻어먹어야 할 처지인 내가 물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용의 꼬리이고 싶은 나에게 뱀의 머리 역할은 버거웠다.

거친 형편의 아이들 중 누군가에게는 일을 배웠고 누군가에게는 일을 가르치며 두 달쯤 일했을까? 패스트푸드 본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임금체불 중이어서 점장님들도 월급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행은 엎친데 덮치는 법이어서 우리 매장의 매니저님은 위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얼굴에 근면과 성실을 써붙이고 있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수습을 뗀 첫날부터 나에게 매장 오픈을 맡겼던 매니저님이었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40대 가장이 월급도 못 받고 병이 났다는데 그분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싸워볼 의욕도 사라진 상태로 50여만원의 알바비를 받지 못한 채 나의 첫 알바도 끝이 났다.

그리고 그해 가을 대학원 진학이 확정된 나는 고시원과 거친 생활 체험을 끝내고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부산 집에 내려가 있었다.


내가 평생 살아온 안온한 세계로의 귀환이었다. 이번에는 갈 곳이 확정된 상태였으니 낭인으로 지냈던 지난 2년과도 달랐다. 대학 졸업 후 사회로 나가는 문을 대차게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번번히 문고리에 손이 닿지 못해 주저 앉았던 내가 드디어 어딘가의 문을 가까스로 연 것만 같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그 시절과 작별했지만 같이 일하던 알바생들 중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편지로, 삐삐로 계속 연락을 해왔다.


누나가 권해준 책을 읽었노라고, 누나가 권했던 글을 써보고 있노라고 편지를 보냈다. ‘참 잘했다.’ 혼잣말로 칭찬해 주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잠깐 발을 담가 본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작될 내 원래 궤도의 삶에 그 시절의 인연을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편지에도 삐삐에도 답을 하지 않자 삐삐에 음성 메시지가 들어왔다.


들을까 말까 고민했다. 다시 서울에 올라가게 되면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기도 힘이 부칠텐데 이 아이와의 인연을 끌고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한 마음이 이겼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누나가 바쁜가보다 생각했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녹음된 메시지를 지웠다.

그 시절은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삶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굴러온 돌 같은 것이어서 내 주위에는 나 말고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20년 동안 이 이야기를 묻어두었다.

가끔 생각한다.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그때 너에게는 내가 세상 다시 없는 현자 같았을지 모르지만 나도 미숙하고 제 앞가림 못하는 철부지였다고. 니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이 나에게는 두꺼운 김장비닐로 몇 겹이든 싸서 어딘가 깊이 묻어두고 싶은 시간이어서 너를 함께 지웠다고. 그 시절 니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20년 늦었지만 사과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진 관계를 상처 없이, 에너지 소모 없이 끊는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도 내 가장 어두침침했던 시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게 지금 나의 한계다. 20년 후에 돌아보았을 때 20대의 나에게, 40대의 나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내가 된다면 그것도 나이 들어가는 것의 의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블로그에 썼던 글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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