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스스로를 소녀가장이라고 소개할만큼 나에게 직장일이라는 것은 자아실현이라든가, 나로서 존재할 시간이라든가, 내가 이만큼 교육받은 사회 구성원이 된 이상 나의 능력을 사회에 돌려줘야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든가 하는 고상한 영역이 아니었다.
결혼할 때 남편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장학금은 학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했기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회사를 꼭 다녔어야 했다. 그러니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기쁜 마음 한편에는 그것이 나의 퇴사 사유가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한 여성이 사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의 돌봄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진리여서 나는 이제 막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놓고 훨훨 자유롭게 신앙생활에 매진하려고 하던 나의 이모께 태어날 내 아이를 돌봐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조카딸이 가정의 주 부양 책임을 지고 있는데 그 아이의 아이를 내가 키워주지 않으면 저 아이의 집은 어떻게 될까,라는 질 필요 없는 책임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그 부탁을 이모께 드리러 갔을 때 이모는 흔쾌히 답을 주지 못하셨다. 끝내 이모는 내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셨지만 답을 주시지 않던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울었다. 세상에 올 내 아이가 출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쉽게 호언장담을 하지 않는 성정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모는 마침내 힘들게 마음의 결정을 하셨고 30대 기혼 여성의 행복은 아이를 봐주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널리 알려진 기준에 따르면 이모가 아이를 봐주시는 동안 나는 행복한 엄마였다.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라는 생각을 하시면서도 결혼 후 20여년 만에 맞은 자유를 이렇게 금방 저당잡혀야 한다는 게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이제야 절감한다. 그때는 머리로 알았다면 아이들이 커서 이제 놔두고 한나절 나갔다오는 것은 고민거리도 아니게 된 자유를 맛보고 나서는 그것이 얼마나 놓기 힘든 가치였을지 뼈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건강한 50대 여성이 인생의 가장 자유로운 시기를 저당 잡히고 어깨와 허리와 무릎을 갈아넣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는 점점 손이 덜 가는 방향으로 자란다.
노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반대다. 마침내 삼시세끼를 스스로 챙기기가 힘겨워진 부모와 합가하거나 건강 문제로 집에서 모실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는 순간부터 부모는 천천히 능력을 잃어간다. 처음에는 집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고 공간을 하나 마련해 드리고 들고 나는 것을 챙겨야하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삼시세끼 밥을 입에 넣어드리고 이를 닦아드리고 볼 일을 처리해 드리고 마침내 손발의 끝부터 굳어가다가 마침내 숨이 멎는 것을 보는 일이다. 돌보는 자식도 나이가 들어가는데, 점점 더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아버지가 나의 할머니를 보내드리기까지의 돌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며 집을 떠난 후 장남인 아버지는 할머니의 집과 우리집을 팔아 할머니와 함께 살 수 있는 더 큰 집을 사서 할머니를 모셨다. 그때부터 10여 년 후 수시로 호흡곤란을 호소하시는 할머니를 가정에서 모시기가 어려워져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5년을 계셨다. 한 집의 살림을 책임졌던 존재가 방 하나에 들어갈 짐만 챙겨 아들의 집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병원에서 내어준 서랍 두 세 개에 들어갈 짐만을 들고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수축의 역사가 눈물겹다.
일 년에 한 두 번 친정에 갈 때 근처 요양병원에 할머니를 뵈러가면 어린이집 아이들처럼 할머니들이 모여앉아 종이로 꽃을 접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누워있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걷다가 지팡이를 짚고 걷다가 결국엔 다시 눕는 인간사의 파노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최고의 부러움의 대상은 내 명의로 된 집의 갯수도, 매달 나오는 연금 액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식이 나를 보러 오는 빈도와 횟수인 것이다.
그 기준에서 우리 할머니는 그 세상에서 여왕과도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남들은 자식이 주말에 한 번 올까말까한데 우리 아버지는 매일 가셨고 생의 마지막 2년 동안은 하루에 두 번 할머니를 먹이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요양병원으로 출근하셨으니까. 아버지는 잔정은 없으셨지만 당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한 일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하셨다.
그런 아버지도 할머니를 보내드린 후 농담처럼 이런 속내를 비추셨다. 퇴직 후 10년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건강한 시기라는데 내 10년은 망했다고.
아버지는 요즘 부쩍 엄마에게 잔소리가 많으시다. 코로나가 극성인데 그렇게 목욕탕을 가야겠냐고, 그렇게 자주 친구를 만나야겠냐고, 무릎도 안 좋은데 왜 산길을 걷냐고, 체력도 약한데 집에서 가만히 좀 있으면 안되겠냐고.
이제 둘만 남은 황혼의 부부는 양쪽 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단계가 끝나고 나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돌보다가 마침내 혼자가 된 후 자식에게 의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기까지 기나긴 돌봄의 역사가 언제 다시 누구로부터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시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돌봄의 청구서를 내밀며 이 세상에 온다. 생의 한 시기 누구나 그 돌봄을 받았고 그 돌봄을 하게 된다. 요즘은 그 돌봄의 청구서를 돈을 주고 처리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나도 가끔 네 분의 부모님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면 그분들을 잃을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과는 또 다른 막막함을 느끼곤 한다.
내 아이를 보살펴 주셨던 이모가 그러셨듯이 흔쾌히 받아들지는 못할 청구서지만 언젠가는 받아들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네 분 어르신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하게 당신의 일상을 영위하시기를 그리하여 내가 받아들 돌봄의 청구서가 아주 오래 유예되기를, 너끈히 감당할 만하기를, 나의 마지막 또한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오늘을 살아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