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블랙위도우는 어떻게 됐다고요?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콜롬비아 작가 마르케스를 만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문학전집 소속인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어느 틈에 조용히 서재에 잠입중이었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다음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수식과 함께. 물론 2023년 현재, 이와 같은 인구통계는 부적절하다. 대표적인 한국 작가 또는 인도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나 대륙별 대표를 선정하면 대륙 내에서 수긍을 못할뿐더러 특히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나머지 대륙에 대한 무더기 평가는 인종차별이다. 그 누구도 아니 에르노를 '유럽' 대표작가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다시 말해,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와 푸익은 그냥 세계적인 작가다. 이제 막 스페인어로 번역되고 있는 한국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최소 20년 이상 앞서가고 있는. 그렇다고 한국 작가들이 뒤처진 것은 아니고. 한국문학의 수출의지가 부족했으나 (물론 내수의지와 마찬가지로) BTS와 봉준호 이후로 분위기가 역전된 것 같다. 그리고 재외교포들의 활약이 큰 도움이 됐다. 우리는 해드린 것도 없는데.


책수집 TMI지만 2011년 <마담 보바리>,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들여놓고 이 두 책과 마찬가지로 여지껏 방치했던 책(고르는 눈은 있었나봄)이다. 읽고 쓰기를 가장 열심히 했던 시기는 2021-2022년 리부트를 제외하면 바로 그 무렵, 읽고쓰기와 수집의 분량 차이가 컸고(!) 그래서 못 읽고 남은 책.




본문의 대부분이 두 사람의 대화인 이 작품은 영화, 뮤지컬, 연극 등으로 제작되어 한 시기를 풍미했다고 한다. 왜 이 책을 사 두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이 샀던 <마담 보바리>,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한글판은 이미 당시에 읽(고 까먹)었기 때문에 최근 완독 리스트에서 제외된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목록으로 봤을 때 '성공한 막장(치정)드라마'를 연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쓰던 장편소설은 일본소설 원작의 한국영화 <싱글즈> 또는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연상할만한 분위기였다. 목표한 기간 내에 완성하지 못하고 서른이 되어버려서 열정이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식었다.


한편 <거미여인의 키스>는 그 막장 레퍼런스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었다. 지금 읽어보니 그땐 왜 읽을 수 없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나도 푸익처럼 영화덕후라서 한동안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다가, 주요관심사가 영화에서 춤으로 바뀌고 난 뒤 이 책을 살때쯤엔 시나리오를 등지고 소설을 향했(으나 이 책이 시나리오에 가깝다는 건 모르고 샀)던 것이다. 시나리오 연구는 프랑스소설 원작의 한국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작품으로 했다.




그런데 넷플릭스 시대에 푸익을 소환해보니 생각지도 못한 재미와 의미가 있었다. 스페인어권 드라마와 영화를 아직 못 봤지만, 미국드라마 중에서도 특히 멜팅팟(다인종 사회)인 뉴욕, 미래의 내고향인 마이애미, 주인공이 전국일주를 기본으로 거의 세계일주 하는 FBI 수사물을 밥먹듯이 섭취하는 중에 스페인어권, 특히 라틴 아메리카 혈통의 캐릭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원래 남미 음악, 춤, 언어를 좋아했지만 해당 언어로 쓰인 책이나 드라마까지는 영역확장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드는 스테레오 타입과 안티-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고 따라서 히스패닉은 백인들보다 열정적으로 묘사되거나 아예 그 설정을 뒤집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의 미드에서 라티노스만큼 신경써서 배치하는 동성애 성향의 캐릭터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집하다보면 아리송하다. 그와 관련해 (이미 소장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각과 레퍼런스를 제시한 것이 바로 <거미여인의 키스>였다.

영화덕후의 덕심을 부활시켜준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와 10년 전에 사둔 책이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중이다. 아마 책을 구입한 그 시절에 푸익을 읽었더라면 (음악, 춤 덕후였으니까) 볼레로와 아바네로의 라틴 소울은 느꼈을지라도 현장 경험치가 부족해 저자가 추구한 고급 막장드라마의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푸익의 또다른 시그니처인 상호텍스트성에 대해서도 반감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2차 저작물이 환영받(고 욕도 먹)는 시대지만, 12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은 신문물이었다. 래거시 미디어의 권위가 조금은 있었고 일반인과 창작자의 사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이 흘렀다. 블로거를 하려면 전문가용 디지털카메라가 필요했던 시대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인이 남의 말을 출처없이 사용하는 게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반인이 침해하기에는 경계가 뚜렷하고 권위가 너무나 달랐던 시절이었다.


똑똑한 내 친구들은 남의 말을 잘도 읊조렸고, 나는 그게 싫었다. 암기력에 대한 질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난 암기를 못해 추론과 창작을 해야만 했(는데 너무 말이 되니까, 당연히 암기일거라 오해받)는 내 입장에서 너무 쉽게 암기를 하고 짜깁기를 하는 똑똑이(?)들을 보면 갑자기 서러워진다. 논문 좀 써보신 선배님들이나 전문작가님들은 출처를 확실하게 밝힌다. 하지만 인용문과 인용문 사이에 허세가 끼는 순간 저자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최근에서야 방대한 인용문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학문적 가치가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수많은 온라인 매체를 끼고 저자와 일반인의 경계가 허물어짐으로써 정말 배운 사람까지도 마음을 비우고 진솔하게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어로도 읽어보고 믿을만한 역자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해외 작가들과 그런 작가들 위주로 텍스트를 연구한 재능있는 역자들의 필력을 알아가는 중이다. 순수 국내파의 경우 비문학 글쓰기가 탁월한 저자가 드물다. 이미 문학으로 전향한 저널리스트나 과학자가 아니라면.




<거미여인의 키스>의 주인공 '영화 읽어주는' 거미여인은 정확한 기억력이나 논리적인 재구성을 기대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 평론을 오히려 상대방이 하게 되는 대화 자체가 영화와는 별도의 긴장감을 준다. 짧고 굵게(?) 등장하는 각주를 통해 동성애를 심리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거미여인이 영화를 재구성하는 눈높이와 비슷해진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등장인물인 거미여인처럼 갈팡질팡하는, 텍스트 외부의 전문가님들을 의도적으로 소환함으로써 각주가 본문에 권위를 부여하는 기존의 문서체계를 뒤집는다. (카더라를 통해 공고해지지 않는다! 독자가 기죽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정확한 기억력, 고집스러운 비판과 선동, 각주의 권위 등에 신물이 난 지적인 대중들에게 신선한 해방감을 주었을 것 같다. 스포일러는 꾹꾹 눌러담겠다. 매니악한 장르소설(?)이나 B급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니악한 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이나 아주 난해한 영화는 정말 별로.


레퍼런스와 등장인물과 독자가 같은 필드에서 아무말배틀을 하는 것 같은 이런 시도를 더 많은 작가들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기억력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냐고? 인용을 잘 하는 작가들 한두명의 책을 참고해 각주노트를 만들자.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리버데일> 직전 시즌을 참고하자. 책을 읽고 보면 더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