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여유가 있어서 그녀들을 만났던 것이 아니었다. 외롭거나 어울릴 사람이 필요해서 그녀들을 만났던 것이 아니었다. 굳이 추억을 나누려면 그전에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그 시절을 나눌 사람도 그들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틈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옛 직장'에 박제된 사람인 것처럼 그녀들에게 잊혀졌다, 아니 제껴졌다는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직장에서 버티고 싶은 오기가 나름 처음으로 생겼는데 그와 별개로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은 그녀들에게는 내가 진부하고 지루한 사람인양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비집고 자라났다.
우리는 그저 봄방학을 함께 보낸 사이였을까?
"언니한테 말하기 좀 죄송한 이야기라 참았어."
"나한테? 왜?"
"이 과장은 어린 애들만 싫어했거든."
"아하. 그래서 나랑 마찰이 없었던거지?"
"맞아. 록시언니는 어리고 예쁜데 포뇨언니는 안 어리고 예쁘니까 자기 딴에는 리스펙트 한거지."
"그렇게 포장하지 않아도 돼. 이 과장은 그냥 그런 사람인거야. 뭐랄까."
"본인이 예쁨을 독점해야 하는데, 나처럼 덜 예뻐도 어리면 눈길이 가니까 견제하는 사람."
"혜미야."
혜미가 나를 의식해서 겸손하길 바라지 않았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러기 시작하면 피곤해서 못 살 것이다. 이걸 뭐라고 요약하지? 경국지색?
"너 예쁜 거 너도 알잖아."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게. 일단 지금은 록시언니가 작업도 질투도 많이 받잖아."
"그건 록시가 적당히 어리고 적당히 조숙해서 그런거지. 넌 얼마전까지 미성년자였고."
"그러고 보니 그렇네."
"물론 네가 나이를 속이긴 했지만,"
"뭐, 노안인 걸로 쳐도 록시언니만큼은 아니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하지?"
"뭘 뭐라고 해. 십년 후에는 니가 역전할거야."
혜미와 록시를 이성애적 연애시장의 평가기준으로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둘 다 어렸고, 특히 혜미는 성인 여성의 외모를 하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병아리 같았다. 이 소녀는 얌전한 친구들이 먼저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어리둥절한데, 학교 밖에 나와보니 록시같은 대선배에게 치여서 본인이 빛나는 걸 알지 못했다.
"넌 아직 순수하고, 그게 티가 나서 견제를 덜 받는 거야. 아쉬워 하지 말아."
"아예 무심하면 비교하지도 않았을거야. 나도 견제를 받는데, 록시언니한테 못 미치니까 샘나나봐."
"뭐, 그럴 수 있어. 너도 사람인데."
"록시언니는 피곤해서 어떻게 살까?"
"네가 록시만큼 경험이 쌓이면 더 피곤해질걸? 미리보기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
페이스북을 통해서 혜미의 학교생활을 관전했지만 그 후로 딱히 혜미와 어울릴 계기는 없었다. 혜미가 클럽에 간다고 한들, 또래 친구들과 함께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공개적 기록은 적당히 편집되어 올라왔다. 그날 이후 혜미와 록시가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계속 만나고 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우리 모두의 구심점이 있었다면 나는 그곳에서 이탈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곳에 그대로 있었는데.
내가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그녀들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혜미의 존재도 점점 잊혀져갔고, 혜미를 통하지 않으면 록시의 소식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록시가 내게 기대한 것이 있었다고한들, 나는 그에 부응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다.
이 과장은 내가 입사했을 때 이 회사에서만 7년차인 대선배였다. 나이는 비슷했지만 그녀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든다거나 눈을 마주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권위적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과장들보다 젊고 여리여리해서 알게 모르게 지원사격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본인은 그게 싫어서 더 방어적이었다. 결국 그 해를 채우지 못하고 이 과장은 이직했다. 그녀가 없으면 더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과장의 후임인 최 과장과 일주일 동안 신경전을 한 뒤, 작정하고 진짜 취업준비를 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직진할 수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계획은 현실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