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지 <귀매>
새벽에 소복을 입고 피를 닦으며 걸어오는 여자. 그게 귀신 아니면 뭐겠어? -97p
내가 너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 네가 날 풀어 주는 것, 아니면 내가 널 죽이는 것. -254p
범죄 ‘해결’에 주력하는 스릴러와 다르게 마귀 ‘퇴치’에 주력하는 오컬트는 일종의 길티플래저를 제공한다. 이 마음이 편견에서 기인함을 통쾌하게 뒤엎었던 흥행작과 연관추천작 덕분에 묻혀있던 걸작이 되살아났다. 코멘터리 북과 함께 읽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귀매>라는 작품이다.
작품 내부에서도 지적호기심을 충족하면서 무속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완충하고 있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살아 움직이는 묘사 덕분에 재미있다. 민속학, 인류학자가 된 유은지 작가가 과학자 지망생이었을때 쓴 작품은 <전설의 고향>보다 과학적이고 2022년 이후에 주목받은 명작 이상으로 쫄깃하다.
아씨의 주변에는 제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물들이 모여 있습니다. 아씨의 영적인 파동이 그들을 강하게 끌어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씨는 자신도 모르게 요물의 힘을 빌려 쓰고, 그 대가로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내어주는 게지요. -142p
아침에 준 책, 그 책에 나오는 제의에는 ’중심이 되는 집안‘이란 게 있더군요. 그런데 그거 그쪽 집안이지 않나요? -303p
자신의 운명을 깨달음으로써 모든 나쁜 안개가 걷힌다네. 존재 가치라는 건 그것을 모를 때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일세. -406p
초자연적 존재란 완전히 학문의 세계로 안착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를 가진 현실의 한 모습이자, 픽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다. 얕게나마 알아가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할까. 아마도 2022년 전후에 구상하기 시작한 (결국 K-오컬트가 되어갈 예정인) 아주 긴 시리즈를 위해 연료를 모으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출간된 직후부터 애타게 소장욕구를 불태우던 <귀매>를 오랜 밀당 후에 읽었다. 휴재기간에 연달아 만난 <파묘>와 <밤의 얼굴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작별하지 않는다>, <혼모노> 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저 세계의 존재들 덕분에 가상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받아쓰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다시 <귀매>로 돌아와,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속 영상화를 (능숙하게?) 하면서 작품의 깊은 맛을 경험했다.
<귀매>는 이처럼 사라져가는 종교와 그 사라짐을 가속화시키는 사회 외적인 요소에 관한 글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분별한 서구화는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우리의 민속을 잘라내거나 늘여서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한다. 그러나 피로 흥건한 침대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은 더이상 우리 고유의 민속이 아니다. -414p, 초판 작가의 말
<파묘>(2024)를 관람한 직후 나 혼자 몰래 좋아해왔던 『귀매』를 더 기다리지 말고 내 손으로 개정해 세상에 내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된 한국형 오컬트 작품이 22년 전부터 이렇게 번듯하게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리고 싶다.
—편집자의 책소개(코멘터리 북)
‘읽는’ 소설에서 ‘보는’ 소설로, 취향의 테마파크를 지향하는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는 <귀매>와 같이 내적 영상화에 최적화된 소설을 발굴하고 있는 것 같다. 찜해둔 <성소년>이 플레이 시리즈로 재출간된 것을 보며 이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볼륨업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