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굿바이R>
저곳은 어쩌면 림보 같은 장소이다. 림보는 죽은 자들이나 가는 변방의 경계라는데, 어쩌다가 나는 산 채로 그곳을 오가게 된 것일까. -298p, 작가의 말
표제작인 「굿바이 R」은 소설가 혜란이 발리에서 소설 속 인물 R과 관련된 꿈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R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사구미 해변」 「파푸아뉴기니 행성」은 여행지나 이국의 지명을 제목으로 삼고 있고, 「승객」 「막연한 각오」도 품을 떠났거나 떠날 예정인 자식들과 어머니가 함께 보내는 여정이고 보면 소설은 대부분 집을 떠나 어딘가에 가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284p, 해설_우애와 연대의 분신술(서영인)
영화 <밀애>의 원작소설로 입문해서 대학시절 내내 신작을 읽다가 <황진이>에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정작 대표작을 읽지 못한 최애 작가 전경린. 작년 초봄 20년 만에 재독한 (절판된) <황진이>는 이제야 제대로 읽혔다. 초독 당시에는 (그보다 앞선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독해에서 그쳤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무렵 읽고 쓰려는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비좁았다. 입고 추는 것이 더 좋아서.
구간의 사진을 찍으러 가던 길에 잠깐 들렀던 서점에서 (퀴즈와 상품증정까지 했던 구매목록인) 권여선의 소설집 두 권과 공지영의 초기작, 그리고 전경린의 근작이라 할 수 있는 <굿바이 R>을 발견했다. 또다른 최애작가인 김애란의 대표작도 있었다.
새로 등장한 작가들에 대한 호기심과 그새 좋아져버린 (나로서는 늦게 발견한 권여선과 한강, 김연수를 포함한) 연상의-새로 등장한 작가들이 또래 혹은 연하인 것과 대비되는-작가들과 병행하느라 하염없이 오래 걸린 이 독서는 마침내 1년이라는 사이클을 완성했다. 무슨 단편집을 두 달에 한 편씩 읽는 거야, 하다가도 책이 엮이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하루만에 후루룩 읽어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표제작이자 근작인 동시에 중편으로서 분량도 담당한 ‘굿바이 R’의 경우엔 해를 넘겨서 다행이다. 이 작품은 드라마 <옥씨부인전>과 오버랩이 되면서 작년에 다시 읽었던 <황진이>와 한국 고전에 대한 갑작스러운 호기심을 일으켰다. 여권만기일이 다가오는 이 시점이 되기 전에는 소설 속의 여행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든 가고 싶어 죽겠지만, 2년 전만 해도 ’더 멀리‘ 가고 싶었다. 한국어가 통하지 않고, 비행 시간이 10시간이 넘는 곳. 지금은 가벼운 여행이 더 좋다. 급조한 캐리어 또는 백팩으로 충분한 곳.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늘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열거한 뒤 어딘가에서 끊어야 했다. 지나간 순간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기억들은 날이 갈수록 더 세밀해지고 부피가 커져 결코 현재에 담을 수 없다. -29p, 승객
”거기는 불가능한 조건에 자신을 바꾸며 적용한 생물들이 사는 곳이야. 이구아나와 바다사자와 자이언트거북, 붉은 게와 아주 작은 펭귄들, 그 종들은 우연히 그곳에 표류해서 특이하게 진화했다고 해. 상상해봐. 그런 곳은 사막이 아니야.“ -82p, 합
”셋째의 자리를 메우고 살든, 첫째의 자리를 메우고 살든 마찬가지야. 우린 원래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고 사는 존재일 뿐, 자신이란 아무 의미도 없어. 신이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도 순환 반복하며 나타나고 돌아가는 거야. 너 자신에게서 의미를 찾으면 길을 잃게 돼. 원래 없는 것을 찾기 때문이야.“ -220p, 굿바이 R
굳이 정착하려 하지도 않지만, 떠남에 대해서도 별다른 환상을 품지 않는 이 태도야말로 이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이들이 자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의 시대 안에 있다.
-286p, 해설_우애와 연대의 분신술(서영인)
추천사를 쓴 김금희 작가의 책이 대기중이었으나 쓰는 시간과 쓰기 위해 예열하는 시간을 확보하느라 읽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다. 내 속도에 비해 많이 읽었으니 이런 시간도 필요하다. 리뷰계획 영상까지 찍어봤지만 다른 콘텐츠를 부활시키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그 핑계로 다시 느리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R(Rebecca)과는 헤어지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