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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02. 2024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돌아보면 은은한 사랑의 기미로 온 세상이 울렁거리던 여름이었다. -154p, 엄마 없는 아이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181p,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 없었다. -192p, 사랑의 단상 2014



오랜 시간을 들여 다가갔고, 그 후로도 많은 시간에 걸쳐 읽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당연히 그런 생각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한다. 잊어도 잊을 수 없고 원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어떤 시간들(어쩌면 2014년이 포함된)을 지나 없어진 미래를 기억하고 있는 현재를 지탱하게 해주는 사람, 기억, 그리고 다른 아이들, 많은 아이들.




약간 저세상의 맛이라 막연하게 끌려들어가면서도 스파크가 일지는 않았다. 대략 십사년 전 그의 대표작을 사놓고도 결국 읽어보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 그 시절 그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으로 입문한 작가. 그때 막연한 동경을 느꼈을 박혜진 평론가의 마음은 그 시절의 내가 기억했어야할 미래일지 모른다.


다만 ‘엄마 없는 아이들’을 읽고 나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직 좋아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좋아했던 마음을 잃어버린 작가들을 향한 호기심에 불씨가 당겨졌다. 책태기는 그 시절 이후로 없었지만(굳이 말하자면 그 시절이 아주 길었지만) 한동안 시장조사하듯이 책을 읽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계기가 됐다.


저자가 ​단편소설을 쓰지 않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박혀있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2014년이다. 그해에, 그러니까 그날로부터 며칠 전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탔고, 처음으로 도쿄 시내를 거닐었고, 그곳의 사쿠라를 만났다.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그것 말고도 많지만 기록하지 않은 것들은 금세 휘발될 것을 안다. 그날 아무것도 모르고 예술의 전당으로 뛰어가던 발의 감촉, 해마다 그날이면 페이스북이 보여주는 내 사진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게라도 기억을 해야 하기에 지우지 못했던 십년, 그마저도 무뎌질 것 같은 미래를 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29p, 이토록 평범한 미래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211p, 사랑의 단상 2014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245p,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미래를 품고 있는 그 과거는 사라지지 않을 과거가 된다. -260p, 박혜진의 해설_바람이 불어온다는 말



두 번의 가을을 거쳐온 이 책을 세 번째 가을에 마쳤다. 애타게 찾아헤맨것 치고는 오래 붙들고 있었고 오래 뭉갠것 치고는 단숨에 후반전을 해치웠다.


마지막 작품을 읽고 (장편이 아님에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표제작을 한 번 더 읽었다. 대구 할아버지는 그렇게 지민의 엄마와 한 번 더 겹쳐졌다. 가을을, 아니 겨울을 이제는 쓸쓸하지 않은 장면으로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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