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여름밤 열 시 반>
스페인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친 날 밤, 날이 새기 한 시간 전이 가장 춥다. -88p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는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죽이고 도주중이다. 마침 사건이 일어난 마을을 지나던 마리아 일행은 폭풍우와 정전, 살인범 추적으로 어수선한 이곳에서 방도 없이 하룻밤을 보낸다. 호텔 복도에 아이를 누이고 로드리고에게 집착하는 마리아. 그녀의 의식은 자꾸만 클레르와 피에르에게 돌아온다.
마리아의 친구인 클레르와 마리아의 남편인 피에르는 이제 막 눈이 맞아 호시탐탐 둘만의 시간을 노린다. 그것도 본처와 딸이 보는 앞에서. 마리아는 클레르에게 질투는 할지언정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클레르는 마리아 모녀를 케어하는 피에르의 일손을 덜어주는 역할도 하는 듯하다.
마리아의 깊은 권태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예고된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그것.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모종의 짝을 이루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볼 수 있는 무기력함과도 연결된다. <길모어 걸스>의 프랑스인 집사장 ‘미셸’이 알려준 싫어증, ennui라는 단어를 소환한다.
낮잠필수인 스페인의 여름,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밤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무더위가 해소되었으나 밖에는 살인범이 돌아다니고 안에는 방이 없다. 겉으로는 로드리고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지만(물론 경찰이나 호텔 관계자에겐 불면증이라 둘러대지만) 속으로는 매의 눈으로 친구와 남편의 외도를 상상한다.
어쩌면 이 모든 건 마리아의 망상일까? 남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계속 술을 찾는 마리아, 그녀를 원망없이 사랑하는 친구와 남편과 딸. 이미 이런 상황이라면 싸우기도 귀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로드리고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그것을 대신 표현하고 있다.
밤중에도 열려 있었던 카페 정면의 그늘에 차를 세운다. 성당. 그리고 세 점의 고야. 또다시 여름휴가.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도와주는 이유는 뭘까, 동기는 뭘까? 잠에서 좀처럼 깨어날 줄 모르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이번엔 어떻게 일어날까? 클레르의 좌절된 욕망이 속에서 들끓는 동안 그의 몸을 밀밭에서 끌어내어 차에 태우는 거야. 열한 시 십 분이다.
-112p
그들은 아직 그곳에 없다. 머릿속에서는 더위가 아직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만, 호텔 내의 빛은 색조가 변해 있다. 사랑이 끝난 뒤 블라인드가 올라간 것이다. -160p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안 데바레드는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자기 내면에 숨어 있던 죽음에 대한 욕망을 깨닫는다. 『여름밤 열 시 반』의 마리아는 폭풍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서 살인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구출해냄으로써, 그 성공 여하에 관계없이, 남편 피에르와의 파국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한다.
-177p, 옮긴이의 말_사랑과 죽음의 둔주곡(김석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작년 여름에 읽고 약 일 년 만에 <여름밤 열 시 반>을 읽었다. 겨울에 산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곧 읽을 생각에 설렌다. 뒤라스가 40대에 썼던 작품들로 덕질을 시작한 건 행운이다. 팬데믹 때문에 조금 일찍 맛보았던 권태, 어쩌면 이것도 성장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