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레베카 스톤> 31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3부



나는 돌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지금 맹세할 수도 있지만, 소녀는 바로 내 곁을 지나쳐서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 맞았다. 그것은 정말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유령이었을까?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깨어 있는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새의 그림자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혹시 소녀는 오래전 고대 도시 라이에 살았던 주민 중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파리, 2001년 5월)


르네는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 큰그림과 최종목적지만 정해두고 자유롭게 탐색하는 베키, 미나, 복영의 가문과 달리 르네의 가문은 주도면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때 뉴올리언스를 주름잡았던 영매를 배출한 가문 출신의 외숙모에게 모든 것을 전수받았으나 숙모의 본가를 포함해 르네의 조상 중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르네의 유일한 혈육인 레미 오빠는 어쩐지 엄마와 닮지 않았고 기력이 없었다. 엄마가 여섯 살에 세상을 떠난 후 외삼촌 부부는 르네를 친자식처럼 아꼈지만 레미는 그나마 아빠가 말없이 곁을 주는 게 전부였다. 삼촌과 숙모를 차례로 잃은 르네는 그들의 빈자리를 감당하기 힘들어 도망치듯 파리에 왔다. 이건 표면적인 구실이다.


르네는 혼자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느라 온갖 잡귀들의 악담에 시달렸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되찾은 외숙모는 ‘몽파르나스 북샵’이라는 두 단어를 남긴채 숨을 거두었다. 원혼이든 물건이든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외숙모의 장례식에 참석한 지인들 중 르네가 믿어도 될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르네는 실제로도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무기력하진 않았다. 무기력해보이려고 노력하면서 파리 여행계획을 세우고, 적당한 때를 노려 어학연수 과정에 등록했다.


프랑스어 집중 수업은 파리를 탐색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다. 소그룹보단 훨씬 규모가 있는 강의실에서도 르네는 미나를 첫눈에 발견했다. 파리 곳곳에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학생들은 많았지만 미나의 아우라는 한국과 미국을 자유자재로 왕복했기에 미국인인 르네마저도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오해할 뻔했다. 하지만 미나는 영어권 영혼에게 빙의되지 않는 이상 영어를 거의 못했다. 미나의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간 미국인이라는 건 훨씬 나중에 알게 됐다.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에서 나고 자란 르네보다도 파리를 편하게 느끼는 듯한 미나에게 남다른 호기심과 질투 섞인 부러움이 올라왔다.


이제는 르네도 안다. 한국인 특유의 한이 미나에게는 거의 없지만, 그걸 읽을 수 있는 눈치와 미나의 신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파리의 원혼들을 깨웠다. 이 원혼들은 미나 곁을 맴도는 르네를 은근히 비웃었다. 르네는 새로운 원한을 숨긴 채 미나에게 접근했다. 미나가 일하는 서점의 단골이 되어 서점과 그 주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어찌나 미나에게 집착했던지 정작 르네 자신이 맴돌고 있는 미나의 장소가 서점이라는 깨달음에도 이르지 못했다.




(파리, 2017년 8월)


르네가 지하실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폴이 태어나서 미나와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한동안 미국에 있다 돌아왔지만 예상대로 서점은 그대로였고 미나 역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미나는 특히 폴에게 애정을 가졌다. 그렇다고 르네에게 곁을 주지도 않았다. 서점 지하실 입구에는 다양한 물건이 나름의 규칙에 따라 쌓여 있었고 무엇보다도 꽤 무거운 테이블이 복도 중간을 가로막고 있었다. 미나가 있는 동안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미나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절호의 찬스였다.


메리는 매사에 시큰둥하긴 했어도 미나의 신뢰를 얻을만한 예리함과 치밀함이 있었다. 르네와 미나의 관계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지만 일에는 철저했다. 르네는 메리가 바쁠 때를 틈타 지하실 쪽 복도를 연구했다. 직접 언급하거나 눈에 띄게 그쪽 방향에 관심을 보이는 건 위험했다. 그러다 한계가 왔다. 한계인 동시에 기회였다. 오늘처럼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과 무관하게 무력한 사람이 되는 날. 각자의 기다림에 지쳐 각자 주의가 흐트러졌을 때. 르네는 지루하다는 듯 작별인사를 했다. 메리가 퇴근모드를 시작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르네는 지하실 쪽 복도를 미끄러지듯 통과해 계단실 옆 사각지대에 숨었다. 전에 봐둔 곳에 비상열쇠가 있다면 메리가 퇴근한 후에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메리는 서점의 문을 열려고 열쇠를 찾다가 갑자기 어떤 느낌이 들어서 문을 그냥 당겨봤다. 휴가철에는 바깥에 한번 더 자물쇠를 채우지만 평소엔 안에서도 열 수 있는 두 개의 잠금장치만 개폐한다. 그러니까 르네는 갇히지 않았다. 지금은 이미 탈출한 듯하다. 서점 안은 메리가 퇴근했을 때와 같았다.


메리는 지하실 쪽 복도를 확인하려고 불을 켰다. 스위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희미하게 르네의 향수 냄새가 났다. 지하실 쪽 복도는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복도 중앙에 놓인 테이블이 조금 흐트러졌나? 다른 구역과 다르게 이곳은 세부지시가 없고 기본 청소만 하면 된다. 메리는 이 근처를 유심히 관찰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계단실 문을 마주한 메리는 심호흡을 했다. 어쩐지 그간의 음침한 기운이 힘을 잃은 듯 했다. 문은 잠겨있었다.


“실례합니다.”


밖으로 향하는 문에서 나는 종소리와 함께 조르주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메리는 테이블이 놓인 복도를 통과해 다시 서점의 창가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연락 받고 오신거죠?”

“네. 르네가 연락이 안되네요.”

“지금도 안되나요? 여기엔 안 계셔요.”


메리는 자신이 잠그고 나간 뒤 르네가 안에서 열고 나갔다는 걸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르네를 찾은 것도 아닌데, 르네를 안에 두고 퇴근했다는 중대 실수를 말해야하나. 사장님은 어차피 알게 되겠지. 조르주에게 자신의 실책을 고백하자니 민망했다. 그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었지만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 이유도 없었다.


“문은요? 퇴근하실때 잠그셨을텐데.”

“저, 그게. 사실 제가 퇴근한 뒤에도 한동안 계셨던 것 같아요.”


메리는 일단 문이 열려있었다는 말을 최대한 늦게 고백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했다. 결정적 단서는 잠금해제된 문이었으나 향수 냄새와 미묘한 흐트러짐, 지하실에서 빠져나간 듯한 ‘악마의 기운’의 부재, 무엇보다도 두 개의 문 손잡이와 스위치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온기 등 단서는 넘쳐났다. 첫인상이 허술한 사람의 말을 조르주가 믿어줄까?


“혹시 지하실 근처가 좀 상쾌해지지 않았나요?”


메리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기둥에 걸린 그림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폴이 갑자기 훅 들어왔다. 폴은 서점에 자주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익히 봐오던 작품의 패러디라 쉽게 읽혔다. 처음 서점에 왔을 때 그림 속에 갇혀 있던 거미들이 지금은 없었다. 미나 이모가 무언가를 봉인해두었는데 엄마가 그것들을 데리고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거미가 없네.”


폴의 시선을 따라간 조르주가 폴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조르주 역시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존재를 바로 읽어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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