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밤

<레베카 스톤> 32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이어짐)


초희가 아니었다면 미나는 파리에 다시 갈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나는 1999년 판테온에 있는 포털에서 초희를 처음 만났고 얼마 후 조르주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당시 그런 미나를 따라다니던 무명의 여성 예술가 마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악령에게 점령당한 몸으로 미나에게 접근했다. 악령은 더 건강한 몸을 원했지만 미나에게 틈이 생길때마다 초희가 신력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미 임신한 미나는 어쩐지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미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면 언제쯤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미나는 조르주에게 귀국한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고, 조르주는 피렌체에 있는 본가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파리를 떠났다. 미나는 머지 않아 혼자 견딜 수 없게 될 것을 예감하고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편을 수소문했다. 조르주와 항상 가던 카페에 편지를 맡기고, 그가 돌아오기 전에 귀국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우연히 경복궁을 지나가다 포털이 느껴져서 초희와 재회했다.


초희는 마리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해치고 있는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며, 미나가 그 악령을 봉인해야 더이상의 피해가 없을 거라고 했다. 미나가 판테온의 포털에 입장했을 때 깨어난 악령의 수는 초희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그 중에서 기력이 쎈 놈이 마리를 발견했고, 마리의 원한이 극대화되었을 때 마리의 몸을 장악했다. 미나는 그제서야 마리가 생각났다. 뿐만 아니라 판테온을 드나드는 동안 점점 강해지던 파리의 사악한 기운들까지. 미나는 그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고 한국에 온 것이지만 그들이 다름아닌 미나로 인해 깨어났을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제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




마야가 베키 몫의 저녁 식사를 데우고 상을 차리는 동안 베키는 샤워를 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베키의 집인 미나 이모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있던 많은 일과 과한 피로감으로 지쳤지만 각성이 떨어지지 않았다. 베키는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문자를 확인했다.


-메리 서점 가는 중

-아빠랑 곧 서점 도착할거야

-아까 줄리앙 소파에서 발견한 시간표가 있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게 폴의 수업날짜랑 시간이래


이모와 폴에게서는 이동 중이라는 연락 이후의 업데이트가 없었다. 헨리크의 문자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였다. 줄리앙이 폴을 만난 시간을 따로 기록해두었다고? 줄리앙이 조르주나 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줄리앙은 ‘폴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을 이동시키는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은 조르주가 데려오고 데려가기 때문에 줄리앙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아이였다. 그런데 왜?


-르네를 원하는 존재는 줄리앙을 제압할 수 있는 체력을 아직 갖고 있으니


베키는 ​르네가 사라졌을때 이모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라서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르네를 스토킹하던 존재가 르네의 수호천사인 줄리앙을 먼저 제거하기 위해 르네 또는 그 가족이 줄리앙과 접촉하는 패턴을 관찰한 걸까. 그러다 줄리앙에게 들킨 걸까.




집으로 돌아온 르네는 폰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 르네는 폴과 조르주, 미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오랫만에 자유로웠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자신의 능력을 믿고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한 기분은 새로웠다. 그동안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그런 믿음이 없어서 불행했구나. 왜 나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던걸까? 미나를 너무 일찍 만나서? 외숙모가 친엄마가 아니라서? 아니지. 외숙모가 계셨을땐 나름 행복했다. 외숙모를 떠나보내는 것도 모자라 그녀를 통해 한을 풀지 못한 잡귀들이 르네에게 화풀이를 해서?


심지어 잡귀들마저 르네를 무시했다. 외숙모가 들어주지 않거나 들어주는 척 하면서 미루었던 소원을 르네에게 물려주기는커녕 ‘넌 어차피 들어도 모른다’는 식으로 악담만 잔뜩 퍼붓고 떠나갔다. 르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어쩌면 그날 이전에는 르네가 이렇게 삐뚤어진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니,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이제야 르네는 무언가를 차지할 희망이 생겼다. 자신의 허기를 연료 삼아 활활 타오를 무언가. 이제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밖에서 발소리와 말소리에 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르네는 서둘러 태연을 가장한다. 위스키 한 잔을 놓고 널부러져 있던 자세를 추스르고, 남은 한 모금을 마저 털어넣었다.


“엄마! 언제 왔어요?”


거실에 있는 르네를 보고 폴이 뛰어와서 안겼다. 조르주는 르네의 잔이 빈 것을 보고 술병과 빈잔을 가져왔다. 속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늘 연락이 늦다고 투덜대던 르네가 일부러 연락을 안 받은거라면 좀 얄미워보이기도 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했었어? 난 몰랐어.”

“엄마 전화기 어디있는데요?”


르네는 그제서야 정신을 잡고 가방을 뒤졌다. 바닥까지 탈탈 털어도 휴대폰은 없었다. 이걸 어디서 꺼냈더라. 서점에서 나올 땐 가방 안에 있었을텐데. 오는 길에 한잔 하느라 흘린 건가. 뭐 술집에서 청소하다 발견하면 폴이나 조르주에게 연락 오겠지.


“가게에 두고 온 것 같아. 내일 찾으러 갈게.”

“내가 지금 갈까?”

“아니야. 다 피곤할텐데. 쉬고 내일 얘기하자.”


르네는 현실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표정을 감출 자신이 없어서 대화를 피했다. 조르주는 채운 잔을 들고 말 없이 드레스룸을 향했다. 폴은 시선을 피하는 르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해도 폴을 속일 순 없다. 엄마에겐 사랑보다 깊은 권태가 있다. 특히 아빠에게 그랬고, 폴과 미나 이모에게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베키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이다. 엄마가 폴을 애지중지했으면 베키에게 묘한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아빠나 미나 이모처럼. 그들에게는 가끔 해석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진다. 엄마는 무심했다. 심지어 마르셀 선생님도 폴과 베키의 당당한 애정표현을 부러워하는데 엄마는 오히려 베키가 폴의 관심을 독차지해서 홀가분해보였다.


지금 이 사람은 내 엄마가 맞다.




마르셀은 보호자 침대에 앉아 줄리앙을 지켜보는 동안 점점 긴장이 풀렸다. 병원에 서둘러 오느라 갈아입을 옷이나 간식, 책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은 모두의 도움을 받았으니 더이상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이럴때 미나 누나가 있었다면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고 옆에 있어주기도 했을 텐데. 내일도 줄리앙이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휴대폰을 꺼내려다 주머니에 있던 종이를 같이 꺼냈다. 아까 줄리앙의 방에서 발견한 메모였다. 폴의 수업 시간표. 마르셀 자신의 달력과 대조해야 하는데 바로 병원에 오느라 당장은 불가능했다. 조르주는 르네를 만났을까? 아무래도 이 날짜는 르네에게도 중요할 것 같았다. 조르주에게 전화해 폴의 수업날짜를 확인해야겠다. 아니면 문자를 할까? 마르셀은 자신이 누구에게 전화를 하든 받는 사람이 놀랄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문자로 어떻게 물어봐야할지도 막막했다. 예시의 날짜에 폴이 수업을 했나요? (당연히 했겠지. 물증을 요구해야 하는데, 마르셀 쪽에서 대조할 자료가 없는 이상 조르주가 뭘 보내줘도 확신할 수 없겠지.) 다른 아이들이 합류하기 전 폴이 몇번 왔죠? (이렇게 물어보면 수업 얘기인지 아닌지 헷갈릴지도 모르겠군.) 폴이 6,7월에 월 2회만 수업했나요? (그보다 많은데, 메모에는 그 날짜만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마르셀은 문득 헨리크가 생각났다.


헨리크라면 직접 메모를 봤으니 베키나 폴, 조르주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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