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스톤> 33화
(전편에서 이어짐)
한때는 그녀도 이름이 있었다. 남의 무덤에 몰래 같이 묻히기 전에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그 대단한 판테온에 남몰래 묻힌 까닭에 죽어서도 숨죽여야 했다. 하안 연기가 되어 밤산책을 하는 다른 귀신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속이 까맣게 타버렸고 그러다 자기 이름을 잊었다. 검은 연기가 된 그녀는 이제 다른 귀신들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공원을 벗어나 도시를 배회했다.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을 피해 그림자 속에서 연인들을 구경했다. 이름을 가지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이미 타버린 속이 더 까맣게 그을렸고 그녀는 점점 더 진한 연기가 되었다. 그믐밤 조명이 거의 없는 골목길에 있어도 그림자의 가장 안쪽에 숨지 않으면 피어오르는 석탄가루처럼 그녀의 타버린 속이 드러났다.
미나가 판테온에 오던 날이었다. 블랙홀보다도 검디검은 연기가 되어버린 그녀의 원한이 깨어났다. 그녀가 죽었을 때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봉인되었던 원한이 풀려나 검은 연기 속으로 합류하면서 이 검은 연기는 이제 유독가스가 되었다. 그녀에게 의지라는 것이 다시 생겼다. 검은 연기는 더 이상 본능적으로 사람을 피하지 않고 능구렁이처럼 그림자 속을 유영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수상한 부랑자를 보면 그를 통과하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살아있는 자를 스치면 그자는 정신을 잃고 검은 연기는 급속도로 투명해진다. 여전히 그녀는 몸을 사리는 검은 연기였다. 분노를 되찾았으나 그걸 해소하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한 채로 더욱 검게 타들어갔다.
밤마다 원한을 부채질하던 연인들 중 한 커플이 헤어졌다. 한 명은 파리를 떠난 듯했다. 다른 한 명은 슬픔에 잠긴 채 자기 혼자 데이트 코스를 반복했다. 검은 연기는 그 사람을 지켜보다 그가 마리라는 여성인 걸 알아냈다.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던 연기가 마리를 보고 각성했다. 마리의 슬픔이 분노로 응집되면서 연기도 점점 각성했다. 마리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마리의 몸을 지켜보는 게 힘들어졌다. 마리를 혼절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마리의 분노와 원한은 점점 연기를 끌어들였다.
마리는 그녀를 끌고 다녔다. 그러다 마리는 그녀가 되었다. 그녀는 마리가 되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녀는 분노에 잠식당하기 시작한 마리가 되어 그 분노에 어떤 연료를 공급할지 고민했다. 그녀처럼 사람의 몸을 탈취해버린 악령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 파리를 암흑 속에 빠뜨렸다. 마리는 마리의 몸에 싫증이 났다. 검은 연기 속에 원한을 넣어준 사람, 미나를 갖고 싶었다. 미나가 되어 다른 악령들까지 흡수하면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미나는 시름시름 앓더니 사라졌다. 마리는 아직 원한이 덜 여물어 안전한 사람들의 작은 불만을 자극했다. 그들이 분노하고 증오심을 드러내면 그 순간 그들의 감정을 먹어치웠다. 마리는 인간의 감정을 공급하며 마리의 몸이었던 육체과 악령의 원한을 유지했고 감정을 먹힌 사람들은 영혼없이 간신히 일상생활을 영위하다 시름시름 앓았다.
일 년 뒤, 드디어 미나를 발견한 마리는 오랜만에 자제력을 발휘한 채 숨죽이고 미나를 따라갔다. 미나는 어쩐지 기력이 훨씬 강해졌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연기로도 존재하기 어려울 듯한 예감이 들었다. 미나는 그림 속에 거미의 윤곽을 연필로 그려두고 그 윤곽 안쪽을 강력접착제로 채워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미나를 향해 돌진하던 순간, 마리는 기절했고 검은 연기는 강력접착제를 블랙홀 삼아 박제되어버렸다. 이제 그녀는 거미가 되었다. 살아있는 거미가 아닌, 그림 속에 박제된 거미.
베키는 일단 그 시간표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걸 본다고 해도 폴에게 확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진이라도 확보하고 싶었다.
-시간표는 선생님이 갖고 계시겠지? 내가 연락해볼게.
헨리크에게는 이렇게만 설명하고 다시 마르셀에게 보낼 문자를 생각했다. 선생님에게 선생님 조카의 사적 기록을 달라고 하기엔 아직 너무나도 초보인 탐정(또는 마녀)였지만 미나 이모와 친하신 분이니까 이해할거라 믿었다.
-무슈 마르셀, 제가 그 시간표를 봐도 될까요? 우선 사진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베키는 열한 살 인생에서 가장 정중한 표현으로 선생님께 증거 사본을 요청했다. 마침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마르셀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메모를 정갈하게 촬영해서 보내고 가능한 차분한 속도로 답장을 입력했다.
-미나 누나와 폴의 가족들에게도 알리는 게 좋겠지? 내가 직접 연락하는 것보다 베키 네가 이모에게 설명드리는 게 빠를 것 같구나.
마르셀은 베키와 미나의 원격 밀착 소통에 희망을 걸었다. 베키를 통해서라면 폴과 조르주에게도 사적인 질문을 하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현장에 헨리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줄리앙과 르네의 연관성도 미나와 조르주가 (둘이 직접 통화한 지는 아주 오래된 것을 마르셀도 알고 있지만) 훨씬 빨리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폴과 베키가 서로 끌려서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줄리앙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르네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며 줄리앙의 손을 잡았다.
폴은 베키의 문자를 읽지 못했다. 아빠가 씻는 동안 엄마에게 기대어 졸다가 아빠가 안아서 침대로 데려가려고 하자 정신을 차리고 씻으러 갔다. 폴이 씻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작은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엄마와 아빠는 이미 자는 듯했다. 폴은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갔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욕실에서 조르주가 나오고 폴이 들어가는 동안 르네도 정신을 차리고 침실로 갔다. 조르주는 이미 자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르네는 클렌징티슈로 얼굴만 닦고 어제 입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 파묻혀도 잠은 올 리가 없었다.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조르주를 보니까 더 각성되는 것 같아서 르네도 등을 돌리고 누웠다. 조르주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잠은 올 리가 없었다. 조르주는 이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르네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악마와의 거래. 평소에 폴과 더 친했다면 정말 위험했을 뻔했다. 말은 안 했지만 폴도 베키도 각성한 것이 틀림없다. 폴과 조르주는 줄리앙을 기어이 찾아냈고, 르네가 서점에 숨어 있다 나온 것도 알아낸 눈치였다. 르네를 껴주지 않았기에 물어볼 수 없었고 지금은 르네 역시 물어볼 정신이 없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폴, 그리고 베키에게도 오늘은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르네도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 아들에게 사냥당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무력하게 관전만 하다가 잡귀한테 몸을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은 연기는 르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그림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 너를 따라다니는 잡귀를 없애주겠다. 대신 너는 앞으로 파리의 원혼들을 대표하는 영매가 되어야 한다. 할 수 있겠냐?’
미나가 직접 자기 서점에 가두어 둔 것으로 보아 이 존재가 강력한 건 확실하다. 르네는 어차피 계속해서 잡귀들에게 시달릴 운명이기에 그들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검은 연기의 힘을 가지는 게 나았다. 르네가 검은 연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검은 연기가 르네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만 이보다 못한 존재에게 몸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르네는 기어이 설득당했다. 미나와 조르주 사이에 영원히 포함되지 못할 거라는 공포에 조르주를 향해 돌진했던 것처럼.
미나는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폴도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