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행

<레베카 스톤> 37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계속됨)



르네는 서점 옆 골목에 기대어 날이 환하게 밝아오는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집과는 반대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처럼 어디론가 느긋하게 걸었다. 폴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르네의 경로를 관찰하며 걸었다. 점점 익숙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폴이 최근에도 자주 왔던 곳이다. 미나 이모의 집이 있는 길. 아마도 지금 베키가 있는 곳.

르네는 막 문을 열고 있는 빵집 사장과 구면이라는 듯 인사를 나누며 상당한 분량의 갓 구운 빵을 골라서 계산했다. 빵을 들고 베키의 집을 향하는 르네는 즐거워보였다. 그동안의 서러움을 보상할만한 힘을 얻었는지 곁에 폴이 없어도 의기양양했다. 폴은 엄마를 지배하던 무기력을 누군가 걷어갔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기력을 준 것이다. 거미에게 갇혀있던 그 존재가.




베키는 마야를 깨워 폴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들이 있는 집을 비울 수 없으니 마야가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헨리크를 불러서 동생들과 집을 부탁했다. 내가 이렇게 부탁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닌데. 보통은 아빠가 베키에게 부탁하거나 아빠의 부탁을 받은 고모들이 베키의 자발성에 기대는 편이었다. 하지만 실종되었거나 실종된 성인들과 어린이를 조사해야 하는 베키는 이제 탐정이다. 뉴욕이라면 전철이나 자전거로 이동했을지 모르겠으나 파리는 걷거나 믿을만한 보호자와 동승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엄마가 운전하는 이모의 차, 조르주의 차, 줄리앙의 차가 전부였다. 도착했던 날도 공항 근처에 장기주차된 이모의 차를 엄마가 운전했다. 아마 조르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택시를 타기도 했을 것이다.


베키가 열어둔 현관으로 헨리크가 들어왔고, 방에 잠깐 들어갔던 엄마가 나왔다. 베키는 헨리크에게 눈빛으로 다급함을 전달하고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차가 출발한 직후 마야의 폰으로 전화가 왔다. 조르주는 미나의 집에서 자신의 집으로 오는 최적의 경로를 일러주면서 혹시 폴에게 연락이 오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베키의 마음은 스피커폰으로 조르주의 목소리를 함께 들으며 설렘과 초조함으로 팽창했다. 어쩌면 폴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땐 차가 이미 큰길로 나와 있었다.




조르주는 르네를 얕본 것을 후회했다. 신력과 매력이 뛰어난 미나의 그늘에 있었을 뿐 르네는 바보가 아니었다. 다만 조르주에 이어 폴까지 눈치챌 정도로 르네의 신력은 특출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 세계에선 거의 일반인처럼 여겨졌을 뿐이다. 그런 르네가 미나의 남자를 가로챘으니 얼마나 뿌듯하면서도 불안했을지, 조르주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폴이 너무 예뻐서 르네에게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르네가 곁에 있어주길 원하면 잠시만이라도 몸은 곁에 있어주고 르네가 폴의 라이딩을 부탁하면 폴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충분한 에너지를 할애했다.


조르주와 르네는 부부라기엔 결속이 약했으나 부모로써는 충만했다. 르네는 폴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조르주는 폴을 일상의 축이라고 생각했다. 폴은 아빠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로웠고 엄마의 사랑을 조금 더 원하긴 했으나 미나 이모에 이어 베키를 만난 후에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도 잊고 살았다. 조르주가 아이들과 함께 다니는 동안 르네는 다른 일에 골몰했다. 조르주는 그게 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 무심함이 화를 불렀다.




르네는 막 집앞을 떠나는 차를 보며 벅차오르는 기쁨을 간신히 붙들었다. 르네가 있어야 할 곳에서 베키를 소환했을까? 이건 예상외의 행운이다. 르네는 정확하지 않은 육감으로 폴이 베키를 불렀거나 베키가 폴을 걱정해서 폴의 집에 가고 있을 거라 넘겨짚고 차가 골목에서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이제 이 집에는 유아들과 베이비시터 정도만 있을 것이다. 어제 폴을 데려왔을 때 있었던 베키의 동생들은 자고 있겠지. 그럼 누가 집을 지키고 있을까? 옆집에 묵고 있는 베키의 절친이 와 있을 것이다. 폴은 그애가 베키 대신 동생들과 놀아줘서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헨리크가 지키고 있는 미나의 집 현관은 아직 열려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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