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스톤> 36화
(전편에서 계속됨)
르네는 메리와의 우정이 이미 망했다는 걸 알았지만 직접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연기는 이제 자유로우니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모두가 이 상황에 대비하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파리의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할 미나의 비밀, 검은 연기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또는 그 행방), 한도 없는 미나의 자금줄(또는 그 원천), 그 모든 걸 알아낼 수 있는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는 무언가.
지하실에서 만난 그 존재가 시키는 대로 그림 뒤에 있는 벽을 가르고 그 안에 봉인 된 항아리를 깨고 그 속에서 나온 모래더미에 보드카 한 병을 붓고 그 위로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지나가는 걸 지켜봤다. 다시 그림을 걸어두고 돌아섰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르네 자신을 감싼 검은 연기가 보였다.
‘소년이 깨어나 그를 해친 존재를 응징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그때를 위해 준비해라.’
르네는 연기의 명령을 따른 것으로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다만 그가 르네의 몸을 사용하려면 줄리앙이 깨어나야 한다. 르네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자기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란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언가가 되고 나면 다시 무언가를 추구하게 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지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되고 싶은 상태’이기만 했기에, 되고 난 후를 짐작해볼 여유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상태’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간호사가 줄리앙의 상태를 체크하고 병실의 조명을 낮추었다. 담요를 덮고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던 마르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새로운 문자는 한 개, 베키에게서 온 것이다. 지금 마르셀의 상황을 알고 있을만한 사람은 어제 줄리앙을 찾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 뿐이다. 조르주와 메러디스는 나머지 식구들의 일로도 바쁠 것이고, 베키에 의하면 미나는 지금 파리로 오고 있다.
마르셀은 스트레칭을 하고 일어나 줄리앙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줄리앙은 의식이 없을 뿐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맥박과 호흡은 안정적이다. 누군가 그의 영혼만을 노린 것처럼 신체는 그저 깊은 잠에 빠진 건강한 소년이었다. 마르셀은 줄리앙이 자기만의 임무를 스스로 부과했다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서운했다. 아직 줄리앙이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더 그랬다. 하지만 줄리앙이 성인이어야 마르셀도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지금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지만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마르셀이다. 줄리앙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마르셀은 줄리앙이 깨어난 후에도, 그에게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폴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드디어 연결이 되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조르주였다.
“베키니?”
“폴은 씻고 있나요?”
“모르겠는데. 찾아보고 알려줄게.”
“참, 이모가 오고 있어요.”
“알았다. 바로 전화할게.”
조르주는 폴의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흩어진 이불을 잠시 바라보다 욕실로 걸어갔다. 욕실은 어제 이후로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르네의 침대도 폴의 침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흩어진 이불과 사라진 주인. 거실과 주방, 드레스룸에도 폴과 르네는 없었다. 어제 위스키가 있던 테이블에 와인잔과 와인병이 추가되었고, 거실 창문이 살짝 열려있을 뿐이다. 조르주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르네에게 전화했다. 소파 밑에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르네의 폰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베키에게 전화를 했다.
“폴이랑 르네, 둘다 집에 없어. 폰은 두개 다 있고.”
“제가 갈게요. 기다려주세요.”
조르주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아직 미술관도 개장하기 전이었고, 폴과 르네가 휴대폰을 두고 간 것을 보니 일부러 따돌린다는 느낌이 든다. 베키의 예감을 듣고 베키를 통해 미나에게 자문을 구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비행중인 미나와 연락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조르주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고, 커피 머신을 켰다. 차가운 주스로 목을 축이고, 다시 카페인을 들이부어야 할 시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