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양동에 있는 공유작업실 겸 독립서점 시일 북스앤웍스
안녕하세요. 프리랜서 콘텐츠 기획자 겸 에디터로 일하며 '시일 북스앤웍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의성입니다.
평일에는 제 작업 공간이면서, 저와 결이 맞는 프리랜서 분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공유 작업실로 운영하고 있어요. 가끔 모임이나 전시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기도 하고요. 토요일에는 서점으로 운영해요. 제가 틈틈이 모아 온 빈티지 서적과 함께, 일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도서들을 선별해 판매하고 있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자산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 혹은 각자 자기만의 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시일'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실'을 길게 발음하면 '시일'이 되는데요. 제 아내가 실과 관련된 작업들을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부분도 있어요. (웃음) 작업물들이 기계처럼 빠르게 산출되는 세상 속에서, 실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 시간은 단순히 허비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실'은 사람들과의 연결을 상징하기도 하고요.
직장 생활 6년 동안 나름 만족하며 다녔어요. 다만 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는 이상, 지금의 안정과 행복이 언젠가 끝날 수 있겠다는 미지의 불안감이 항상 있었죠. 그 불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고요.
당시 제 삶은 회사가 전부였고, 그 외의 삶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본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사이드잡으로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글쓰기를 좋아했던 저는 회사 밖에서 프리랜서 에디터 활동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회사 밖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프리랜서 에디터로 활동하며 퇴사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와 배움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꼈을 때 퇴사를 결심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맞닥뜨릴 불안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마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고요.
퇴사 후 일할 공간이 필요했어요. 처음엔 카페를 찾아다녔지만, 일하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더라고요. 아침에 카페에 가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해서 비용적으로 비효율적이었어요.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가는 경우에도, 오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서 일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고요.
그래서 공유 오피스를 이용해 봤어요. 이곳은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지만, 함께 관계를 맺을 사람이 없다는 점이 아쉽더라고요. 그 고독감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자그마한 작업 공간을 마련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와 비슷한 사람과 느슨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된 일이에요.
기획자, 에디터, 마케터, 개발자, 그리고 갭이어를 준비 중인 분들이 함께하고 계세요. 한 분은 최근 프리랜서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셨고요. 감사하게도 이 공간의 시작을 거의 함께해 주신 소중한 분들이죠.
시일에 오시는 분들은 느슨한 연결과 소속감을 원하시는 분들이에요. 프리랜서는 독립적인 주체이다 보니 소속감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는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함께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오세요.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프리랜서는 일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은데, 시일에는 각자 주력으로 삼는 분야가 다른 분들이 모여 있어서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많아요. 보통은 자신의 관심사에 맞춘 알고리즘을 통해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곤 하잖아요. 그런데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알고리즘의 틀을 벗어난 분들이라,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일과 생각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고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될 때가 있지만 전부 제 선택과 판단이라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지속성인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지금 하는 일을 내년에도 이어갈 확률이 높지만, 프리랜서는 달라요. 클라이언트 기반이라 계약 기간이 짧은 경우가 많고, 이번 달 일이 다음 달에도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죠. 늘 불확실성과 미지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해요.
소비 생활이 가벼워야 해요. 누구나 자유로운 생활을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펼쳐내고 싶은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하죠. 그리고 두려움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해요. 프리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지인 중에 10년 차 프리랜서 작가 분이 계세요. 그분께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 하더라고요. 10년 넘게 광야에 살고 있는 분마저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 감정은 떨쳐내는 게 아니라 계속 함께해야 하는 감정이구나 싶었어요. 자유로우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네요.
반면, 두려움을 체화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은 프리랜서보다는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결국 사람의 진면목은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주로 독서 모임, 북토크, 영화감상회를 진행하고 있어요. 대중적 관심사로부터 조금 동떨어져 있지만 함께 나누면 좋을만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죠. 일, 시간, 사랑, 삶의 루틴,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요. 전에 전시도 한번 열었는데, 저희 멤버 중 한 분이었던 예진님의 개인 프로젝트였어요. 편지 형식의 글을 매개로 사람들이 공간에 와서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전시였죠.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저도 시일을 운영하기 전엔 모임 공간을 구하는 게 일이었어요. 제가 원하는 감도의 공간을 찾아야 하고, 모임 인원이 몇 명 모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간과 비용 협의를 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이 공간에서 일하는 멤버분들은 그런 고민 없이 편하게 모임을 열었으면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선순환이라고 봐요. 모임을 여는 분들은 시일 이용 금액을 모임 운영비로 충당할 수 있고, 외부에서는 시일을 바라봤을 때 모임이 자주 열리는 장소,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인식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매주 직접 모임을 열었다면 분명히 벅찼을 거예요.
책 좋아하는 분들의 가장 큰 로망 중 하나는 나만의 서점을 차리는 거잖아요. 시일에 서점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사람들이 편하게 방문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덕분에 책을 매개로 관심 있었던 서점 사장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을 조명하는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게 됐죠.
캐서린 메이의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에서 밑줄 친 문장이에요. '속도를 늦추고 자연스럽게 여가 시간을 늘리고 충분한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요즘 유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지 몰라도 꼭 필요하다. 겨울은 우리 모두가 아는 선택의 기로이자 허물을 벗어야 하는 순간이다.', '이런 일들을 하는 동안 온갖 고통스러운 신경 말단이 드러나고 너무나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할지 모른다. 반대로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면 해묵은 껍데기가 더욱 견고하게 자신을 뒤덮게 될 것이다.'
겨울은 침잠하고 활동성이 줄어드는 시기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회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잠을 잤는지보다, 잠을 줄여가면서 무엇을 성취했는지,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져요. 누군가 감시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핍박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죠. 이 문장은 현 사회 모습에 의문을 던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정말 옳은 걸까, 충분히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아요.
작년에 화장실 수도관이 터진 일이 있었는데, 저한테는 정말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어요. '내가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몰랐구나', '정말 무지했구나'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죠.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퇴근하기 전에 물을 살짝 틀어놓고 나왔어요. 이게 지금의 시일과 저를 보여주는 모습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작은 경험일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큰 깨달음과 배움의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지향했던 시일은 정적이고 차분한 공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시일은 조금 더 복작이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공간이 최종 목표를 이룬 완성된 공간이라기보다, 앞으로의 활동을 위한 전초 기지 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고요. 특히, 앞으로의 1년은 출판사로서의 사무 공간이라는 정체성도 더해지길 기대하고 있어요.
저도 인터뷰어로서 질문을 한 적은 많지만 답을 한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요. 시일이 1년이 되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지난 1년을 돌아볼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