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뜨겁기 보단 차가웠던 적이 많았다. 선천적으로 냉소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기질이 있나보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주어진 신앙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신앙은 어떤 계기가 있어 모처럼 불타오르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뜨거울 수 없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종교와 신앙심에 대해 특별한 회의감에 들게 만든 건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에 실시되는 중고등부 수련회였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신나는 CCM 찬송가가 나오면 다들 어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날뛰게 되는지. 잔잔한 노래가 나오면 또 다들 어찌 그리 자연스럽게 손을 높이 펼쳐 들고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부르는지.
날카로운 기타와 은은한 베이스, 리드미컬한 드럼 그리고 부드러운 전자 피아노의 연주 소리는 예배장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다들 드럼 박자에 맞춰 춤을 추고 감정에 고취되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나는 전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차마 내 손을 들어서 몸짓을 하지 못했다. 목청껏 찬송가를 부를 수 없었고, 슬픔에 잠겨 통곡하는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칠 수도 없었다. 아마 저들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이끄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겠지. 나는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 해봐도 전혀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는데. 목소리도, 몸짓도 어색하기만 했는데. 저들은 나와 달리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일까?
다들 하나님을 진심을 다해 찾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을 간절한 이유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고 하나님 역시도 그들의 절실함에 응해주신 걸거다. 기도 시간이 되면 다들 난데없이 울적한 침묵 속에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본인들의 간구하는 바를 속사포처럼 외기 시작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찬양팀 세션의 연주는 여전히 화려하지만 서정적이고 느릿한 리듬으로 이행한다.
나도 억지로나마 몇 마디 쭈뻣쭈뻣하게 중얼거려 본다. 내가 감사해야 할 것, 잘못한 것, 필요로 하는 것 등, 막상 먹지로 떠올리려 하니 떠오르지 않는다. 막연히 일반적인 가족의 건강, 학업 정도만 꼬집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몇 가지 일반적인 것들을 떠올리고 나니 금세 말문이 막힌다.
한 3분쯤은 기도를 해냈을까. 그렇게 내가 할 기도가 없어지면 이제 슬슬 그 뜨거운 기도 시간이 끝나면 좋을 텐데, 기도 시간은 끝날 줄 모르고 불붙은 다른 이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도무지 그칠 줄 모른다. 나의 초라한 억지 기도가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빨리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런 기도 시간이 지루하고 싫은 것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이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나이만 차고 성장은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열등감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못 견디게 싫었다. 그냥 말 그대로 기도 시간이 지겹고 재미없는 것 정도였다면 관두고 밖에 나가서 놀아도 상관없었겠지만, 내가 그 자리를 어쩔 수 없이 지키고 있게 만드는 어떤 굴욕적인 힘이 나를 잡아두었다. 나도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 어른스럽게 하나님의 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였다.
교회에선 '이성적으로 믿지 마라. 합리성을 내려놓아라'는 설교를 많이 듣는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성적인 게 문제인걸까? 너무 합리성을 따지는 기질이 문제인 걸까? 분명히 다른 학생들과 내가 다른 점은 그거였다. 생각이 너무 많고 이성적으로 따지길 좋아한다는 것.
어쩌면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격한 감정을 느끼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감정적인 고양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다 보면 성령이 임하는 걸 수도 있다. 여름이나 겨울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수련회를 고통스럽게 흘려보낼 수만은 없다. 이제 나도 나름대로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애썼다. 이성을 내려놓고 나를 증명하고자 했다. 뛸 땐 방방 뛰고 흥겨운 음악에 몸을 맡겨 노래를 부르고 조금 어색하고 머쓱하지만 할 수 있는대로 해봤다. 그러니 나름대로 그 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본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지금 이게 그냥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고, 연주 음악이 신나니까 뛰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지, 정말로 가슴 속에 은혜로움이 돋아나서 그런 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굳이 애를 써서 흥겨움을 가슴 속에서 캐어내려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지친다. 사람들 앞에서 자의식을 내렿놓고 그저 리듬에 몸을 맡겨 흥겹게 방방 뛰고, 또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그런 것들이 쉽지 않았다. 마치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그 분위기의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이방인'. 이것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슴에 새겨지는 정체성이었다.
왠지 모르게 부당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사실 교회에서 매주 보는 그 친구들은 그다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난 교회에서 겉도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에서 썩 좋지않은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저들도 그냥 흥겹고 신나서 찬양시간을 즐길 뿐 아닐까? 난 초등학생 때부터 조용히 묵상하면서 성경을 읽고,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써왔는데 그들과 달리 그저 즐길 수 없는 사람일 뿐인거 아닐까. 죄책감에 젖어 회개 기도도 자주 했는데. 그럼에도 나에겐 그 즐거움의 시간이 늦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공간의 '이방인'이자 타자로서 지켜보는 시간이 오래될 수록 그게 알고보면 그 모든 게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커져만 갔다. 전도사님 말로는 본인이 젊었을 땐 그냥 시골 구석 기도원에서 수련회를 하고, 북을 둥둥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 앞에는 화려한 세션과 음향장비를 갖춘 찬양팀이 모던 락 기반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실 세속적인 공연장의 한 갈래 내지 아류작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며 방방뛰는 사람들이 공연장에서 열광적으로 떼창을 부르는 관중들과 정녕 다를까. 적어도 TV 화면을 통해서 봤을 때 그리 다르지도 않아 보였다. 세속적인 사랑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들의 연주도 사람들을 울고 웃으며 춤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미 당대에도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제목으로 반쯤 TV쇼나 공연장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예배 공간의 모습에 비판론이 있었다. 화려하고 신나지만, 사실 그냥 즉흥적인 감정에 고취되는 것이지 성령이 내려주는 거룩함이나 은혜로움 덕분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게 아닐 수 있었다.
다른 종교의 경우를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이슬람의 성가인 '나쉬드'는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저 흥겨운 악기 연주에 도취되는 걸 신에 대한 사랑에 도취되는 것과 혼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성인 남성의 아카펠라로만 나쉬드를 부를 수 있다.
가톨릭을 믿는 아는 형은 이런 말을 한다. 개신교회는 왜 그렇게 요란하냐고 말이다. 성당은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미사가 치러지는 데 개신교의 예배는 흡사 공연장의 모습에 더 가깝다. 개신교의 최신 예배 트렌드, 찬양 트렌드가 가톨릭이나 이슬람의 방식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좋은 방식이라기엔 딱히 성경적 근거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교회 수련회에서 저들을 움직이는 그 힘이 성경적인 게 아닐지 모른다. 열광하고 자리에서 방방 뛰고 환한 얼굴로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부르고, 이내 엎드려 흐느껴 울며 목이 쉬어라 통성기도를 하게 만드는 그 힘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게 아닐지 모른다.
찬양과 통성기도는 개신교 예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 중요한 요소가 사실 다들 늘상 말하는 성령충만함과 거리가 먼 것이라면? 이런 회의감이 커져가자, 내 신앙심은 좀 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