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과 상실(2)

by SIEMPRE

비전을 품고, 열심히 꿈꾸고 노력하라. 그리고 그 노력을 바탕으로 성공하여 영향력을 발하는 삶을 살아라. 다만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라. 세속적 성공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진짜 비전이다. 이것이 청소년 사역자 원 베네딕트 선교사의 요지다.


그러나 뜨겁게 불타던 2000년대의 자기계발 열풍이 가라앉을 즈음, 원 베네딕트의 목소리도 존재감이 사라진다.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공담론 자체가 결과적으로 과열된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피로감을 낳고 쇠퇴해버린 감이 있다. 모두가 상위 1%가 되겠다고 달려들면 결과적으로 병목현상을 맞닥뜨릴 수 밖에 없고 더 뿌리 깊은 좌절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해된다. 한 동안 진보 정치권 일각에서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일군의 가치관에 끈질긴 공격을 가했고, 2010년대 중반 즈음 그 공격은 적어도 담론의 영역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애초에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삶의 조건, 환경 때문에 좀 더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아닐까?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계에서 굳이 개인적인 노력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게 옳은 일일까? 사명감은 우리를 자기착취하게 만드는 속임수일 뿐인 것 아닐까?


나 역시 구조적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저소득층은 노력만으로 삶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은 스펙 인플레이션만 부추길 뿐, 아무런 생산성도 없이 학생들과 청년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런 생각 아래 당장 나부터도 정치적 입장이 고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진보적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분명하게 나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에서 사회민주주의자 사이에 걸쳐 있는 진보주의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원 베네딕트 선교사 역시 학생들과 청년들을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병목 현상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자기를 갈아 넣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오늘의 즐거움을 미루고 오늘은 노력하고 준비하라고 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금욕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 가르침은 삶의 균형, 하루의 균형을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다. 애초에 원 선교사는 종교인이지 정치 경제 문제에 해박한 지식인은 아니었으니, 이런 한계를 미리 예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말과 글을 모두 지나간 것으로 넘겨버리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과연 정말로 사명을 품고 노력하고 준비하는 시간은 부질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은 건 비관과 좌절 밖에 없을까? 비관이 시야를 잠식할 때면 새삼 모든 걸 돌이켜 보게 된다. 어쨌거나 '나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자'는 본질적인 메시지는 여전히 중요한 것 아닐까.


그 사이, 한 15년 간 수많은 담론이 교차하면서 내 또래 세대가 점차 침울한 얼굴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2010년쯤 처음엔 힐링 열풍이 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쉬어갈 때고,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어.


하지만 그렇게 멈춰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다음엔 헬조선 담론이 불었다. 세상을 미워하는 목소리도 자라났다. 예컨대 일베저장소, 메갈리아 같은 공간에서의 원색적인 증오심 표출이 들끓었다. 그 다음엔 정치적 올바름과 공정한 경쟁 담론이 각각 과열된 양상으로 퍼져 나갔다.


모두가 동요하고 있다.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론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청춘들도 많이 있겠지만 적잖은 이들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 대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향에 이끌려 가는 것 같다.


1) 체념과 무기력에 빠져서 소소한 덕질이나 게임, 인방으로 시간을 떼우는 경우


2) 가능한 빠른 경제적 성공에 집착하면서도 경쟁은 피할 수 있는 일종의 '추월차선'을 갈망하고 코인이나 영끌투자에 유혹을 느끼는 경우


3) 본인은 수고로움을 견딜 의지도 없고 더 큰 대의를 위한 사명감도 없으면서 편의주의적 정치적 올바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경우.


이런 시기에 그럼에도 내가 원 베네딕트 선교사의 설교에 무언가 그리움을 느끼는 게 있다면 "왜 성공해야 하고, 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명확한 답을 줬다는 데에 있다. 체념하지 말고, 그럼에도 세상에 기여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한다. 단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더 큰 사명감을 위해 정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또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울림이 있는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 몇 년간 나는 반대로 누군가 말했던 '가재 붕어 개구리가 화목하게 가꾸는 개천 공동체' 이야기가 현 시대에 더 어울리는 가르침 아닌가 생각도 했었다. 무리해서 성공해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 아니, 분명히 필수적이다.


하지만 사실 이건 젊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방향'으로 권하기엔 너무 체념적인 가르침일 수 있다. 청년들은 그래도, 그래도 도전을 원하는 것 같다. 청년기엔 도전이 그 본성 상 어울린다. 나이가 들수록 차차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아름다운 개천'에 행복하게 안착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그 얼마나 서글픈가. 청춘 곁에 도전을 두는 그 어떤 형태의 가르침도 힘을 잃었고 이제 새로 자라나는 사람들이 체념과 '아름다운 공동체'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원 베네딕트 선교사의 말과 글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둘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일종의 구심점이 없다면 텅 빈 메시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더 선량한 자선사업가가 되길 꿈꿔보더라도 거기엔 현실의 차원을 뚫는 강렬한 사명감이 더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종교적 열정을 대리해줄 대체재를 발견하기 전까지(아니면 청년들이 다시 죄다 종교 신자가 되기 전까지) 이런 방향의 메시지가 호소력이 없을 수 밖에 없단 생각도 든다. 그저 내 입장에선 그렇게 상실해버린 메시지가 그립고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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