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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일기

그래도 나는 부평을 사랑한다

by 소윤

인스타그램에 짤막짤막하게 남긴 단상들을 아카이빙했습니다. 완성된 글은 아니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평은 정말로 개 같은 양아치 동네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시민 의식이 낮다. 나는 부평에서 나고 자랐다. 어쩔 수 없이 나한테도 좀 쌍것의 피가 흐른다. 가끔 서울에서 '왜 여기선 담배를 피울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흠칫 놀란다. 차도에 일렬로 주차된 외제차(반은 리스고 반은 카푸어다)때문에 버스가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유료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다. 어느 날 부친과 대화를 하면서 '애인이 나를 집 앞으로 데리러오는데 주차장을 찾느라 좀 늦는다'고 했더니 부친께서는 '왜 주차장에 차를 대느냐'고 반문하셨다. 이는 부친의 잘못이 아니며 전적으로 부평의 잘못이다. 이게 다 도시 전체의 주차장화를 이뤄낸 부평 때문이다.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한 부평에서 성장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급 문화(부평사람인 내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대개 이름이 붙은 거리나 박물관, 전시관, 공연장을 뜻한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그런 힙한 분위기에 잘 어우러지거나 그런 시설들을 익숙하게 사용하거나 태생적으로 고매한 분위기가 깃든 사람들에게 저열한 열등감이 있었다. 부평엔 술집과 프랜차이즈 식당과 모텔과 카페와 옷가게와 신발 가게밖에 없다. 대학에 와서 그 열등감은 극에 달하여 씨네큐브와 아트하우스 모모를 열심히 다녔다. 잉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프랑수와 오종을 좋아한다고 대외적으로 말하고 다니려고 했지만 아무도 안 물어봤다. 다행이다. 누군가에게 베리만과 고다르, 오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지금쯤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하필 씨네큐브에서 제일 열심히 본 영화는 홍상수였고 그래서 끝까지 쌈마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내 취향이 될 만한 것들을 컬렉팅하고 취향에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랑한다. 이때 나의 취향이란 대개 실물로 존재하지 않는 불법 다운로드한 음원이나 토렌트에서 다운받은 영화나 스캔본으로 본 만화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데이터로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실물로 된 앨범과 LP와 그림과 사진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도 벽에 사진과 포스터를 나름 붙여봤지만 바로 옆에는 화초 그림이 새겨진 창문이 있다. 침대에는 모친이 부평 주단 골목에서 구입한 보드라운 꽃무늬 이불. 그 날것의 생활감에 돌아버려서 떼버렸다.


불법 다운로드, 불법 주차, 금연구역에서 흡연하고 침뱉기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시 부평에서 자란 중학 시절 동창들은 중고차 딜러, 통신사 대리점 직원, 사금융, 일수업 등에 종사한다. 인천 지하철에선 기관사를 폭행하지 말라는 방송이 나온다. 부평 문화의거리에는 BJ 철구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철구 PC방이 있다. 부평은 죄책감이 좀 결여된 동네다. 모친이 이불과 커튼을 구입하던 주단 골목은 지금 평리단길이라는 근본도 없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참고로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은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이름인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경리단의 단이 비단 단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토록 유잼으로 충만한 거리에 세상에서 제일 삭막한 이름이 붙다니) 평리단길 초입에는 평리단길 since1955라는 간판이 있다. 1995였으면 일말의 이해심이라도 발휘했을 것이다. 씨팔 구라를 쳐도 좀 상식적으로 제발.


내게 2012년은 컬쳐쇼크의 해였다. 이은석 덕분에 처음으로 이름이 붙은 길에 가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차가운 물에 처음 닿은 아기처럼 삼청동의 티라미수에 전율했고 개인 카페의 인테리어와 앤티크한 식기를 보며 오열했고 서울에 무료 박물관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감읍하였다. 그리고 이은석은 '이 핫초코에서는 제티 맛이 난다' '이 카페의 케이크와 원두는 전부 낙원시장에서 떼온 것이다' '이 소품은 황학동에 가면 아주 싸게 판다' 등의 망령된 발언으로, 마치 내가 무언가에 환상을 갖고 감성을 느끼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예쁘게 디스플레이된 공산품들의 원 출처들을 밝히느라 애를 썼다. 그 때 나는 21살, 이은석은 26살이었다. 26살이 되어서 알았다. 이화동 벽화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 위해 착취당했을 한성대 미대생들의 노고와 결국 벽화를 지워버린 이화동 사람들의 결단 같은 것들을. 재미 없는 어른이 된다는건 그런 프로세스를 알아버리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택배 상자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택배 포장을 할때 테이프 커팅기에서 커팅이 단번에 잘되는 손목의 각도와 적당한 힘. 힙스터 카페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똥구멍에 면봉을 꽂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부평은 그런 프로세스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런 비루한 프로세스들을 지우기 위해 동네 전체가 안간힘을 쓰고 있거나 애초부터 그런 프로세스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건설한 장소같다. 나 역시 부평에 가면 삶의 과정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이고 지난하면서 때로는 조금 불법적이기도 하고 구차하기까지한 일들을. 그에 수반되는 노력들을. 목요일 밤 11시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테마의 거리가 그것을 방증한다. 부평의 소비 주체는 그런 프로세스들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거나 프로세스들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로 돌아가는 도시다. 그러니 죄책감도 뭣도 없는 게 당연하지.




예전에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인천 연고지인 삼미 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꼴찌팀이었다. 인천에서 태어난 소년들은 어쩔 수 없이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해야 하는 비참한 운명에 빠지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잘나가는 서울 팀인 MBC 청룡의 어린이 야구단 유광 잠바를 입고 온다. 놀란 인천 친구들은 그 소년을 힐난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배신자다. MBC 청룡 뽀이는 이렇게 답한다. '부평은 인천보다 서울에 더 가깝다.'이 괴리감은 꽤 많은 부평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 감각이다. 나는 인천인이라는 정체성도 있지만 부평인이라는 정체성도 개별적으로 있으며 부평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더 크다. 부평이 인천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엑기스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부평이 인천 전체의 정체성은 아니다. 나는 월미도를 자주 가는데 월미도는 또 부평이랑은 다른 쌈마이 느낌이 있다. 월미도에는 주말마다 아마추어 밴드의 공연이 있다. 그 날은 무슨 아버지 밴드가 '지나간 내 청춘 돌아오지 않는다네' '나는 지금까지 왜 이렇게 살았나'라는 뉘앙스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좀 좋아하는 인천의 부분이기도 하다. 씩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가끔 한풀 꺾여서 누군가 그 꺾인 구석을 쿡 찔렀을 때 발작하면서 다시 씩씩해지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그런 씩씩함은 주로 동인천이 많이 가지고 있다. 부평은 정말로 개 같은 양아치의 동네고, 주안은 딱 한 번 가봤는데 재수학원 바로 앞에 모텔이 있었다. 인천 터미널을 위시한 구월동 로데오 거리는 부평에서 성장한 양아치들이 진출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구월동 이토타워에는 교보문고가 있어서 자주 간다. 인천의 부는 공항과 가까울 수록 비례하고 공항과 멀어질수록 반비례한다. 아마도 부평이 공항에서 제일 멀 것이다. 지리적으로, 인천에서 가장 멀고 서울과 가깝지만 아주 가깝지는 않은 곳.




아무튼 나는 인천 사람인데 대부분의 인간 관계나 생활 환경의 반경은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그렇지만 피를 한번 갈지 않는 이상 쌍것의 피가 흐르는 것은 여전해서 기회만 보이면 담배꽁초를 투기하고, 히드라처럼 침을 찍찍 뱉고 담배를 피울 때마다 자꾸 쪼그려 앉게 된다. (영화에 나오는 양아치들의 흡연 자세를 떠올리면 된다) 이은석은 본인이 비흡연자이던 시절에도 내가 흡연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반기도 들지 않았지만 단 하나, 내가 담배를 피울 때 쪼그려 앉는 것만은 극도로 경멸했다. 나는 이 자세가 가장 편했고 우리 동네에서는 늘 이렇게 피웠는데 이건 이상한게 아닌데. 이은석이 부평에 왔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올리브영 뒤편의 금연구역에서 흡연을 했고, 내가 담배에 불을 당기자 뒤이어 세 명의 여성들이 차례차례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담뱃불을 붙이자 마자 쪼그려앉아서 정말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서있던 나는 바로 쪼그려 앉았고 이은석에게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20대 초반의 일. 이은석과 편의점에 갔을 때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하면서 나는 계산대 위에 지폐와 동전을 툭 내려놓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이은석은 내게 '계산할 때 돈을 던지면 안 된다.'라고 충고했다. 나는 '돈 안 던졌는데?'라고 반문했다. 왜냐면, 부평의 편의점에서 계산대 위에 돈을 툭 내려놓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내가 20살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도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했으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돈을 던진다는 건 말 그대로 손님이 점원의 얼굴에 돈을 던진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평엔 그런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이은석은 내게 돈을 던진다는게 어떤 개념인지 상세히 설명해주었고 나는 수긍했다. 몇년 후 나는 다시 부평에서 편의점 알바를 하게 되었을 때 손님이 계산대에 돈을 던지는게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알게 되었다.




개미 똥구멍같은 애향심을 발휘해 보자면 부평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부평 사람 밖에 없다. 부평 사람이 아닌 사람이 부평을 욕하면 죽일 것이다.




내 애증의 도시는 부평과 안산이다. 애착을 갖고 있는 도시는 종로, 도봉, 최근에는 수유가 추가되었다. 돈 많으면 수유로 이사갈 것이다. 우이천 왜가리 보면서 한세상 다 살고 싶다. 암튼 나를 거쳐간 도시에 대해서 뭔가 써보고 싶었는데 오늘 입봉이 터진 것 같다. 어떤 도시는 나를 겪었고 또 어떤 도시는 내가 겪었다. 그러니까 똑같이 애증하는 곳이지만 안산은 나를 겪었고 부평은 내가 겪은 곳이다. 종로는 내가 겪은 곳이고 수유는 나를 겪은 곳이다. 그런 차이가 조금씩 있다. 설명하긴 귀찮다.




부평 사람들은 대부분 노래를 어느 정도 부르는데 아주 잘 부르지는 않고 노래방 중상위 클래스 정도. 나 역시 그정도 수준이다. 왜냐면 부평 사람들은 밥 처먹고 코노만 가기 때문이다. 코노에서 면벽수련한 사람들이 문화의거리에서 버스킹을 종종 시도하는데 주로 남자들이 씨발 같은 좋니와 미성년자 성매매범인 이수의 마이웨이만 진짜 존나게 쳐부른다. 가끔 더크로스의 그 쏘유돈크라이포미~ 이거 부르는 새끼들도 있다. 부평의 버스커들은 곡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성량이랑 모창 능력만 어느 정도 있을 뿐이다. 다들 목소리는 또 존나게 크다. 가수로서 부평 최고의 아웃풋으로는 슈스케의 허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부평엔 실용음악학원도 많다. 곡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버스커들은 연남동이나 망원동 쪽에 서식할 것이다. 망원동과 연남동 사람들은 좀 거지 같이 하고 다니지만 길거리 하수구 구멍에 노란 꽃을 꽂아놓는 로망이 있다. 나는 그들이 50만원을 벌면 42만원을 월세로 낼 거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데 분명 이것도 내 저열한 열등감의 발로일 것이다. 부송합니다. 평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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