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의 제목이 체크아웃 3인 이유는 앞전에 체크아웃, 체크아웃 2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체크아웃, 체크아웃 2는 모종의 이유로 폐기되어 영원히 읽을 수 없다.
3. 체크아웃 3은 체크아웃, 체크아웃 2와 관계없는 글임을 밝힌다.
여행을 가고 싶다 어딜 가든지 장소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다만 묵을 방이 좋았으면 좋겠다.
낯선 방에서 다음 날 아침에 눈 뜨는 생경한 기분이 좋았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조용하면 더 좋았다.
소독된 침대 냄새나 세탁된 두툼한 이불 같은 게
생활감이 전혀 없는 살풍경함, 내 흔적을 남기기가 조심스러워지는 방과 나의 거리감 같은 거
그러면서도 방 안에 내 짐과 세면도구 같은 것들을 내 동선에 맞게 풀어놓는 게 좋았다.
화장실 문고리에 세면도구가 담긴 가방을 걸어놓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나는 정말 이상하게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게 죄다 그런 것 뿐이다.
세면도구가 담긴 가방을 화장실 문고리에 걸어두는 것,
바닥에 깔아두면 너무 쉽게 마르던 흰 수건,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같이 방을 쓰던 언니와 잠이 안 와서 둘 다 뒤척거리다가,
이불 속에서 스친 발가락 사이의 적막 같은 거.
근데 가장 좋았던 건 다음 날 아침에 당장에라도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것만큼 다정한 무관심이 없었다.
여행자의 방은 누가 와서 먹고 자고 싸고 가도 누구의 방도 아닌, 그냥 방이니까.
외딴 뻘밭 같은데 펜션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으면 좋겠다.
체크인하고 다음 날 체크아웃 때까지 방 밖에서 한 걸음도 안 나가고 싶다.
밖으로 나갈 일말의 의지조차 말살할 수 있게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혼자서 독채로 펜션 하나를 빌려서 묵고 싶은데
그러면 내 개같이 번 돈을 지나치게 개같이 쓰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나같이 존나 우울하게 생긴 여자가 혼자 펜션에서 하루 묵는다고 하면
자살하러 온 줄 알고 안 받아줄지도 모른다.
정 안되면 집 근처 어딘가에 깨끗한 방 하나 잡아서
하룻밤만 혼자 자고 오고 싶다 그게 여행이 된다 나한테는.
내가 아니어도 좋을 낯선 방에서 하룻밤 묵고 오는 것이.
내가 지금 당장 좋은 것들은 내가 아니어도 되는 것들과
당신이 아니어도 되는 것들 그 누구도 아니어도 되는 것들 뿐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하고 무정한 흰색으로
누가 먹고 자고 싸고 피우고 죽고 그런 것들을 하얗게 덮고 있는 그런 방이 좋다
보라색 침대 시트와 보라색 극세사 이불이 깔린 내 방은
이제 내 신체의 일부 수족 같은 느낌이라 방 전체가 무기력하다.
내 방 안에 누워있으면 팔베개를 너무 오래해 팔이 저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피가 안 통해서 보랏빛이 도는 것처럼, 그런 보랏빛 이불 색깔.
나는 자세를 바꿀 수 없고 겨울 내내 묵은 극세사 이불에서는 무기력한 생활의 냄새가 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하기 싫고 누워 있는데
혈관의 피는 계속 돌고 있다.
내 삶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 묵직한 살덩어리와
살갗 밑에 깔린 맥동하는 핏줄, 맥박, 심장 소리
그 사이의 엇박자 리듬에서 태어나는 거라면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하다
그런 엇박자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한마디로 가끔은 이렇게 살 거면 왜 생명 활동이 연장되고 있는 거지 같은 생각이 든다.
깨끗하게 표백된 방에서 누구의 팔도 베지 않고 하룻밤 푹 자고 싶다.
꿈도 안 꾸고 깨끗하게 표백된 잠.
우리집 근처에는 모텔이 즐비하게 늘어선, 일명 ‘모텔촌’이 있는데.
‘모텔촌’ 뒷골목에는 루비살롱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인디 락 클럽이 있었다.
(그렇다, 루비살롱 레코드의 그 루비살롱이 맞다!)
캐치프레이즈가 '모텔촌의 오아시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축축하고 질척한 사막도 다 있을까.
루비살롱은 2011년에 폐업했다
나는 루비살롱의 존재를 2007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루비살롱에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
나는 이렇다.
알면서도, 좋아하면서도 결국엔 가보지도 않고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
결국 여행은 커녕 또 내 팔을 베고 끈질기게 잠이나 잘 것이다.
영원히 이 방에서 체크아웃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절이 아무리 지나도 묵은 극세사 이불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덮고
이상한 꿈이나 꾸고.
약 열두 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삼키고,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심정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피가 안 통하는 팔다리가 혹시 잘리지는 않았나
감각없는 몸으로 감각없는 몸을 만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