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밤은 어쩔 도리도 없이 몰려와
불면증자에게 밤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상태다. 끊임없이 시간을 죽이면서 죽은 시간과 함께 공존하는 것, 어떤 시의 한 구절처럼 내가 쓰는 글이 유서인지 연서인지 착란을 일으키는 상태. 불면증자에게 밤은 시간이 아니라 빚이다. 깨어있을 때 지껄인 우스운 말들, 대낮에 한 이별 같은 것들이, 밤에 빚쟁이들처럼 몰려와 잠을 이루지 못 하게 한다. 불면증자에게 밤은 지나치게 길고, 괴롭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늘 동생 방을 찾아 들곤 했다. 동생의 비좁은 1인용 싱글 침대에 억지로 낑겨 누워,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으면 동생은 내 팔을 주물러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여주었다. 지금은 동생이 코로나에 걸려 방을 찾아갈 수도 없다. 요새 인기 있는 드라마에선 ‘봄날의 햇살’이라는 별명이 유행하던데, 너는 봄날의 햇살이야. 동생은 자기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아침과 저녁마다 내게 메시지를 보낸다. 약 잘 챙겨 먹었어? 잠은 잘 잤어? 응, 나 잠도 잘 자고 약도 잘 먹었어. 우리 언니 다 컸네. 야, 너 걱정이나 해. 그런데 나는 우리 언니 다 컸네, 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서러웠을까. Y야. 너는 봄날의 햇살이야. 여름의 단비야, 가을의 단풍이야, 겨울의 함박눈이야. 너는 나의 모든 계절이야.
덜 자란 마음은 꼭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 아직 마모되지 않은 마음, 예리하게 벼려져 날이 서 있는 마음. 지나치게 살아 숨 쉬는 마음은 너무도 뜨거워 꼭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혔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마음을 메고 걷는 여행길.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다. 모든 빛을 차단하고 웅크리고 누워도, 밤은 여전히 내게 무엇인가를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나를 포위하고 서 있다. 낮에 빚진 것이 이렇게나 많았나. 낮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웃고, 떠들고, 때로는 저녁 돌아가는 길에 혼자 울기도 하고, 온갖 감정의 빚들이 동시에 몰려와 나를 서럽게 한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감정은 서러움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한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놓치면 안 됐었는데.
간신히 잠들면, 꿈에서는 꼭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만 나온다. 그 사람들이 딱히 그립지는 않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사람들이 꿈에 나오면 아 꿈이구나. 하고 안다. 왜 어째서, 서로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굴었으면서도 한순간에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사람이 되는 걸까. 어째서 사람의 연이란 그렇게 무서운 걸까. 연을 맺는 것이 점차 두렵다. 그저 내 옆에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최선을 다하자 싶다가도, 가끔 다시 못 볼 사람들이 떠오르면 또 잠이 달아나 버린다.
얼마 전에는 메일을 썼지, 오늘처럼 긴 밤이었다. 나는 당신께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생각해보니 너무나 무섭고 두렵네요. 다 잊어주세요. 로 끝나는 메일을. 메일의 수신인은 일주일 동안 메일 확인을 하지 않았고, 나는 발송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 메일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에도 전송되지 못한 메일 같은 마음이 한 가득이다. 매일 그런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새벽에 쓴 글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불태워야 비로소 완성된다는데, 나는 그런 글들을 불태우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안고 산다. 그래도 내 마음이라고. 비루하나마 이것도 내 마음이라고.
비밀 일기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급스러운 양장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그 자물쇠의 열쇠를 복사해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다. 당신이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내 자물쇠를 열어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 열쇠 따위는 버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다가도, 끝끝내 혀를 깨물고서라도 말할 수 없는 게 있고, 어쩌면 나는 눈에 띄게 혼자이고 싶은 건 아닐까.
여전히 밤은 길고, 너무나 괴롭습니다.
*제목은 박연준 시인의 책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