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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시민 Oct 05. 2020

나의 흑역사는 모두 그에게 있다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이 기록은 그만 어리석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길다면 긴 3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1년 여쯤 지났을까. 다른 사람 다 있는데 나는 죽어라 없던 바로 그 썸남이라는 것이 내게도 생겼다. 친한 선배의 지인이었고 가벼운 술자리에게 만나 가볍게 놀다가 헤어졌다. 이틀 정도 지났을까.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 너 그때 그 사람 어땠어?




휴대폰 화면에 둥둥 떠 있는 메시지를 보고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별로였기 때문이다. 낯을 별로 가리지 않는 내가 잘 웃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드립 본능이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해대는 기질이 이상하게 낯선 사람과 있으면 더욱 심하게 발현된다. 경직된 분위기를 싫어하는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술자리에서 매력을 발산하긴커녕 개그맨으로 고용된 사람 마냥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렇게 하얀 불꽃이 되어 돌아온 내게 그 사람이 나의 연락처를 궁금해한다는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희미하게 툭툭 끊기는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 사람의 웃는 얼굴, 반듯한 코, 낮은 목소리, 배려하는 말투 같은 것이 잔뜩 미화되어 연애 감정의 불씨에 훅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나도 썸남이 생기는구나, 쾌재를 불렀지만 최대한 차분한 척, 의아한 척하며 내 연락처를 전해주라는 메시지를 선배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한 달 동안 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 채 장대한 흑역사의 서막이 올랐다.



내가 아주 많은 연애 횟수를 보유한 사람은 아니라 대표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는 만나본 남자 중 가장 아리송했다. 번호를 물어본 사람이 아니라 누가 손에 내 번호를 억지로 쥐어준 사람처럼 행동했다. 밥을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은 뭘 하고 어딜 가는지와 같은 내 일과를 총괄하는 AI처럼 영양가 없는 질문을 던졌다. 한 일주일 정도 그런 지지부진한 연락이 계속되자 성미가 급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우리 근데 한번 안 만나나요?




최대한 공격적으로 묻지 않기 위해 말줄임표를 붙이고 구구절절 문장을 늘이며 메시지를 보냈다(위의 재현은 편의상 줄인 것이다). 일단 연락처를 교환했으면 서로 호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고 사이버 연애를 하는 게 아닌 이상, 만나야 관계를 진전시키든, 후퇴시키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주저하진 않았다. 더 솔직하자면 사실은 거절당할 마음으로 보낸 연락이었다. 번호를 가져간 사람이 이토록 미지근하게 구는 것은 막상 연락을 해보니 내가 별로였다고 느꼈기 때문일 거라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로의 거주지가 기차를 타야 만날 수 있을 만큼 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때 다 같이 만난 것처럼 편하게 보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이게 뭐야.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 모른 척이라니. 거절당하는 것보다 최악이었다. 태연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성격 죽이며 일주일 간 꾹꾹 눌러왔던 응어리가 터지는 것을 걷잡을 수도, 걷잡을 생각도 없었다. 그에게 나의 연락처를 가져간 이유를 물었다. 이어지는 답장에 다른 게 무엇인지 나는 온몸으로 체감했다.




-저는 그 날 되게 재밌어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 연락했어요. 아직 한 번밖에 안 봤으니까...




나는 뭔가 결심하면 번갯불에 콩 볶듯이 후다닥 해치우는 급한 사람인 반면, 그는 스며들듯 아주 천천히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관계를 좁혀가는 사람, 나는 좁게 만들고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지난한 과정과 사소한 일들이 더덕더덕 붙어 이 관계가 무거워졌던 터였고 이렇게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 그 날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썸을 타보려니, 심지어 잘 안되니 감정 소모가 생각보다 컸고 하루 종일 심장이 빨리 뛰어 불편했다. 연락을 끊으니 아쉬웠지만 평온했다. 그러나 그 평안함은 일주일짜리였다. 일주일 후에 또 연락이 온 것이다.



원래 성격상,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굳이 더 가보지 않았을 텐데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사계절 중 가을을 유난하게 타는데 때마침 날씨가 쌀쌀해졌고, 때마침 곧 직업이 달라질 20대 중반이 되어 여러 방면으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고, 때마침 나타난 그는 연애하기에 꽤 좋은 상대 같았다. 뭐가 됐든 연락을 이어가고픈 마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이니 속도야 느리면 어때, 확실하면 되지, 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는 확신이라는 것을 잘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설익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그닥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불분명한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내게 그는 늘 흐릿했다. 잡을라 치면 물러섰고 알겠다고 뒤돌아 걸으면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와 연락하는 한 달 동안 소화 불량에 시달렸고 너 얼굴이 왜 이래, 소리를 듣고 다녔다.



참 웃겼다. 겨우 한 번 만난 사이인데 손에 쥘 수 없으니 더욱 원하게 되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연락을 한 달 동안 이어가는 중에 만나자는 약속들은 서로의 사정으로 어그러졌다. 거리가 먼데 마음까지 모호하니 도무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가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없기로 이름 날리는 나였지만 나도 사람이었다. 보여줄 수 있는 적극성은 다 보여준 것 같은데 만나러 가는 쪽도 내가 된다면 나는 바스라지고 갈려 먼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손목 붙잡고 달린 횟수가 내가 월등히 많았으니 골인 지점까지는 네가 날 끌고 가주면 안 될까 생각했다. 내가 많은 걸 바란 것이었다.



결국 그때의 술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연락이 이제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명확한 끝을 맞닥뜨리니 한동안 연애를 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연애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라며 놀려대는 입과 죽을상을 한 얼굴은 조화롭지 못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굴 거면 번호는 왜 물어본 거지. 왜 한 번을 안 져주지. 평소에도 내 마음에 망설임이 없는 편인데 망설이는 사람을 만나니 더 망설임 없게 행동했던 내 모습들이 자꾸만 일상을 덮쳐왔다.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는 적이 잦았다. 그리고 그 날. 술을 먹는 게 아니었다.



많이 취하진 않았다. 정말이다.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었고 약간은 뭉개지지만 알아듣게 말할 정도는 되었다. 생각보다 친구와 일찍 헤어져 술도 깰 겸 집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코올을 섭취하고 몸집을 잔뜩 부풀린 감정이란 놈은 천천히 그의 연락처를 찾게 나를 조종했다. 후회할 거야. 취한 채로 전화하는 건 진짜 아니라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을 고갤 휘휘 저어 날렸다. 후회해도 괜찮아. 지금 전화 안 하는 게 더 후회할 짓이야. 엄청난 오판을 내리고 그에게 전화했다.



보통 술을 주량껏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편인데 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벅벅 문지를수록 선명해지는지. 솔직하게 느꼈던 모든 것들을 쏟아내는 내게 그는 날이 추운데 집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라며 말하는 내게 본인이 결론을 다 내놓고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그가 웃었던 것 같다. 취해서, 추워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우냐며 그가 걱정했던 것도 같고.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이렇게 끝을 내기엔 나는 그가 너무 아까웠다. 한 달간 나눈 가벼운 이야기들이 털어내도 털어지지 않았다. 시작도 못해보고 마지막을 매듭짓기엔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는 여전히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번지는 가로등 빛을 보며 오랜 시간 사랑이 그리웠던, 그래서 애쓰고 있는 나를 마주했고 전화를 끊었다. 시작되지 못한 연애가 그렇게 끝났다.



그에게 미안하다. 전 남자친구에게도 이런 짓은 안 했는데 술에 취해 다 끝난 썸남에게 전화를 걸다니. 한 시간 동안 이불을 걷어찬다고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썸으로 시작해서 흑역사로 끝나다. 아주 장대하구먼. 푸석한 얼굴 위로 물을 끼얹으며 해장 안 되는 씁쓸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저 사랑하고 싶었다. 마음이 끓어 넘쳐 누구라도 붙잡고 이 온기가 식기 전에 퍼주고 싶었다. 나는 너무 노력했다. 애쓸수록 멀어질 마음이란 걸 알았지만 잘해보고 싶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 관계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좋아했으면 생각할 필요 없이 달려갔을 것이고 거기서 차이든, 만남을 지속하든 다른 형태의 끝이 났을 텐데. 좋아하진 않지만 퍽 괜찮다는 이유로, 연애를 이젠 좀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대적인 프로젝트 하듯 공을 들인 것이 폐착이었다. 나 또한 애매한 마음이었으면서 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느냐고 그를 질책한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나는 한동안 연애를 하지 못할 것 같고 할 마음이 없다. 연락을 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실망하고 무너지는 이 과정을 다시 밟을 자신이 당분간은 없을 듯하다. 성질머리가 더러운 나와 연락하느라 그도 힘들었을 텐데 나처럼 연애 같은 거 못하겠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연애를 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고 싶다. 내가 만나본 가장 느린 사람, 그 진중함을 닮고 싶어 옆을 잠깐 걸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체질인 사람인가 보다. 활자로 옮기니 나는 정말 파닥파닥 요란하기도 하구나.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흑역사여,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이따금씩, 아니 아주 가끔 튀어나와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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