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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Feb 28. 2022

도발적 예술 / 예술적 도발

덴마크의 한 설치 미술가의 기발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급기야 소송으로 이어진다는 보도를 접했다. 작년 9월부터 덴마크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는 모양이다.

57세의 설치 미술가 옌스 헤닝(Jens Haaning)은 2007년에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의 평균 소득을 실제 지폐로 표현한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유로와 크로네(덴마크 화폐)를 각각 한 사람의 일년 평균 소득만큼 캔버스에 붙여 선보인 작품은 노동의 가치를 자본으로 환산하는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전문가들과 시민 사회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덴마크 북부 도시 올보그의 쿤스텐 (Kunsten) 미술관 측은 작가에게 2021년 기준 평균 소득으로 다시 작품을 전시할 것을 제안했고, 이를 위해 2021년 덴마크 1인 평균 소득에 해당하는 53만 4천 크로네 (약 1억원)에 해당하는 돈을 미술가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 일정에 맞추어 도착한 작품은 53만 4천 크로네는 온데 간데 없는 하얀 캔버스 한 점이었다. 

하얀 캔버스의 제목을 “Take the money and run” (돈을 갖고 튀어라)라고 붙인 옌스 헤닝은 작품 제작을 위해 미술관으로부터 차용한 돈을 의도적으로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옌스 헤닝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예술가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설했다. 덴마크 라디오 방송국 DR P1과의 인터뷰에서 미술가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었다. 그는 “2021년 덴마크의 노동 시장을 표현하는 대신 나 자신의 노동 환경을 표현하기로 했을 뿐이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을 권유한다. 거지 같은 일을 하며, 돈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제 돈을 내며 일을 하고 있다면, 계산대의 돈을 가지고 튀세요.” 라고 말하며 자신의 작품에 저항과 선동의 의미를 부여했다. 

작년 가을 뉴스를 접했을 때는 웃을 일 없는 세상에 큰 웃음 주는 사건 정도라고 생각했다. 1억을 받고 튀어 놓고는 작품이라고 하다니, 참 사람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싶었다. 

쿤스텐 미술관은 미술가가 보낸 하얀 캔버스를 그대로 전시하고, 미술가에게 전시가 마감되는 1월 16일까지 돈을 돌려달라고 통보했지만, 돈은 돌려 받지 못했고, 결국 옌스 헤닝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미술가는 돈을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다고 응수했고, 자신의 행위는 도둑질이 아닌 계약 위반이며, 계약 위반 역시 작품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돈을 갖고 튀어라’라는 작품이야 말로 자신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옌스 헤닝에 따르면 작품 활동에 대해 적당한 보수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작품 운송, 설치등에 따르는 경비를 자비로 지불했다고 한다. 그가 4개월간 전시를 하면서 미술관에서 받기로 한 보수는 만크로네 (180만원)이다. 여기에 국가에서 3만크로네 (540만원)의 작품 대여비를 작가에게 추가로 지불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는 덴마크 평균 급여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며, 작품 준비 기간에 소요되는 비용, 실제 작품 제작에 필요한 여러 경비들을 오히려 제 주머니를 털어가며 충당해야 전시가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래를 업으로 삼은 남편과 사는 나에게도 생소한 상황은 아니다. 음악계에도 연주자가 사비를 들여 대관을 하고, 본인의 공연 티켓을 스스로 구매해 되팔거나, 연주 경력에 한 줄을 남기기 위해 무보수로 무대에 서는 일이 있다. 연주자의 보수는 주로 후불이라 공연이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 약속된 보수를 못 받는 경우도 있다. 연주를 준비하는 동안의 경비와 레슨비는 어디에도 청구할 수 없어, 본전만 해도 선방이라는 인식이 보통이다. 한국보다는 사정이 좋다지만 유럽에서도 예술가들은 완전한 노동자의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도 지금의 직장인 덴마크 왕립 극장 합창단원으로 근무하기 전까지는 늘 위태로운 계약직 성악가 생활을 했었다. 예술가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해 값싸게 양질의 공연을 만들어 내려는 극장 관계자들로 인해 옌스 헤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분노했던 경험이 있다. 때문에 미술가의 행위에 동의하지는 못하면서도 내심 통쾌하기도 하다. 

옌스 헤닝을 사기꾼으로 평가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괴한 작품은 예술가 임금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덴마크 문화부는 2022년안에 예술가의 경력이나 전시 성격에 상관 없이 예술가에게 지불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보수를 보장하는 개혁안을 선보일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결국 작가는 계약 위반과 돈을 갖고 튀는 행위라는 예술을 통해 목적했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한 샘이다. 옌스 헤닝의 하얀 캔버스가 사기꾼의 도발로 판결될지 도발적 예술로 인정을 받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예술가의 임금이라는 무척 중요한 질문을 세상에 던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작은책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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