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가 조금 섞였지만, 대체적으로는 검은 커트머리에 편해 보이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서울의 어떤 거리의 행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친숙하고 익숙한 모습이다. 그녀가 앉은 의자 옆에는 한글이 적힌 에코 백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자기소개 시간에 그녀는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남편을 따라 덴마크로 이민을 왔고 몇 해전부터는 현지 어학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K-culture를 좋아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 그러한 자녀들의 관심사를 공유하려는 부모들, 한국 여행을 앞두고 언어를 미리 배워 더 풍성한 여행을 하려는 시니어들, 한국인과 연인이거나 부부의 연을 맺은 덴마크인 파트너들, 그리고 입양인들이 주로 내 수업을 듣는다. 덴마크의 중요 정책의 하나인 '민중 교육'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교육이다. 국가 지원을 받는 민간 교육 기관에서 주최되는 한국어 강좌는 한 학기 단위로 완료되고 시험이나 평가는 없으며, 한 학기를 들은 학생들은 희망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로를 지지하고 느리더라도 모두 같이 발전하는 유쾌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유쾌한 시작을 위해 새 학기 첫 시간에는 언제나 한국어로 간단히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예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저는 한국어 선생님이에요. 저는 덴마크에 살아요.” 정도로 내가 시작하면 학생들이 이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식이다. 작년 가을 학기에 등록을 한 입양인 미나 씨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행여 놀란 마음을 들킬까 봐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요”라고 서둘러 화답했다.
그동안 입양인 수강생이 더러 있었지만 그들 중에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입양인들은 보통 자신을 덴마크인이라고 소개한다. 한국은 그들에게 태어난 곳일 뿐 어떠한 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하는 국가일 수는 없을 테니, 오히려 자연스럽다.
한국어 강사가 되기 전에도 해외 생활을 하면서 입양인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입양인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거나,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며 연민을 드러내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다. 일부러 눈물을 짜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러한 나의 반응이야말로 입양인들이 한국인인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입양인들을 좀 더 만나게 되면서 나의 그러한 연민은 전혀 이해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입양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꼭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들을 그저 덴마크인, 스웨덴인, 이탈리아인, 즉 입양되어 국적을 취득한 나라의 국민으로 대하는 것이 일종의 배려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제 입양인을 만나면 무조건 손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을 보면 나서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나는 그들의 출신에 거리를 두는 방식을 내재화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들을 한국어 수업 수강생으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태어난 나라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며 수업을 신청한 학생들 앞에서는 여러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에게 좀 더 따뜻해야 할까? 신나고 즐거운 한국을 소개해야 할까? 여전히 입양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설명해야 할까? 비행기에 태워 자신들을 멀리 떠나보낸, 그래서 모국어마저도 앗아가 버린 나라가 지금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고,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그들이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과열된 경쟁, 구성원 간의 분열로 속으로는 심하게 앓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들은 오히려 좌절하지 않을까? 첫 시간에 입양인 학생들을 만나면 나는 어김없이 어쩌지 못하고 주저한다.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며 회화 연습을 할 때는 애틋한 부모와 자녀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은 굳이 수업 자료로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한국어를 배우는 입양인들의 마음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그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물을 수도 없기 때문에 수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유지해야 할 적당한 선이 어디인지 고심하게 된다.
한 두 달 수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되면 고맙게도 학생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어 내가 유지해야 하는 그 선을 귀띔해 주는 경우도 있다.
기초반에 등록한 20대 학생이 있었다. 아무 의심도 없이 그 학생이 한국인 이민 가족의 2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민 2세가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도 하고, 입양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렸기 때문이다. 반 학기 정도가 지나고 그 학생이 자신은 입양인이고,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주변 친구들과 다르게 만드는 한국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양부모님들과 한국에 다녀온 이후 한국을 좀 더 알고 싶은 생각에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을 때, 동양적 외모의 젊은 학생들에 대한 마음대로의 선입견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덴마크인 남자 친구와 함께 한국어 수업을 듣는 30대 직장인은 몇 해 전에 한국에 있는 친부모를 찾았다고 했다. 이제 남자 친구와 함께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하는데, 한국의 부모님들께서는 만날 때마다 결혼식을 올리라고 하시고, 쉬지 않고 음식을 권하셔서 힘들다고 했다.
오랫동안 친부모를 찾았지만, 입양 기관들에서는 제대로 된 기록을 전달해 주지 못했고, 그래서 사설탐정을 고용해 친부모를 찾았다는 학생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의 가정에 오래전 아무도 모르게 입양 보냈던 딸의 존재를 드러내길 꺼렸고, 그 때문에 한국에 가도 어머니는 한두 번 밖에는 만날 수 없다고 했다.
휴양지로 유명한 덴마크의 작은 섬마을에서 자란 학생도 있다. 작은 섬 마을이었던 만큼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 덴마크인 부모님은 그녀를 입양하고 2년이 지나 한국에서 더 어린아이 하나를 더 입양해서 그녀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18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자신과 동생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던 아버지가 내년에 80세가 되신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 자녀가 아버지 생신 기념 한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한 학생도 있다. 미나 씨는 71년생으로 71년에 덴마크로 입양이 되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 덴마크식의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가정을 이룰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조차 없었다고 한다. 흔한 한국 드라마도 보지 않았고, K-Pop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몇 해 전 남편의 권유로 가족과 함께 한국 여행을 다녀온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녀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한국을 일부러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왕 아시아로 여행을 간다면 동남아의 휴양지보다는 경험할 것도 볼 것도 많다는 한국에 가보자는 단순한 관광 목적의 여행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입을 열어 영어나 덴마크어를 하기 전까지, 심지어 영어나 덴마크어를 할 때에도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어째서 인지 이 낯선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고 했다. 복잡한 거리를 가득 메운 한국 사람들 틈에서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 여행을 통해 그녀는 덴마크 국민이긴 하지만, 한국 사람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했다. 덴마크로 돌아온 미나 씨는 바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이번에는 혼자 하는 한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미나 씨는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사정이 생겨 수업에 불참하는 날에는 반드시 미리 연락을 해주는 그야말로 모범생이다. 미나 씨는 드디어 한국 여행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혼자 3주 정도를 여행할 것이고, 서울과 부산에 다녀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 정보 같은 거라면 내가 아는 한 모든 정보를 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뜻밖에 그녀의 요청은 입양 서류에 적힌 주소지를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부산 어딘가에서 유기되었고, 그래서 경찰서를 통해 고아원으로, 고아원에서 입양기관으로, 입양기관에서 덴마크로 입양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간 친 부모나 혹은 입양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다만, 다시 한국에 가게 되면 자신이 유기되었다는 그 장소에는 가보고 싶다고 했다. 미나 씨가 건넨 서류는 71년 당시 경찰이 고아원에 미나 씨를 인계하면서 작성한 서류인 듯했다. 손글씨와 한문이 뒤섞여 있는 50년이 넘은 서류의 해석은 나에게도 다소 난해했다. 일단 서류를 사진으로 찍어 집에 와서 한참을 들여다 보고 주소를 옮겨 적고 검색을 해보았다. 해당 주소는 검색되지 않았다. 부산 지형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실제 이러한 지명이 존재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 주소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미나 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산에 있는 지인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몇 대째 부산에 살고 있는 지인은 동사무소와 지역 어른들의 도움으로 당시 주소를 확인해 주었고, 미나 씨가 유기되었던 그 주소지의 지금의 주소도 찾아 주었다. 어르신들에 의하면 당시에는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였다는 주소지는 지금 사거리가 되었고, 미나 씨가 유기된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는 작은 부동산이 하나 있다고 했다. 미나 씨에게 서류상의 예전 주소와 지금의 주소를 타이핑해서 전달해 주었다. 여행을 앞두고 주소를 받은 미나 씨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고, 드디어 벚꽃이 피는 봄에 3주 수업 결석을 예고하고 한국 여행을 떠났다. 미나 씨가 무탈하게 그리고 아주 행복하게 3주를 보내고 오길 바라면서도 지금은 황량해진, 자신이 남겨졌던 그 자리에 혼자 선 커트머리에 마른 체형의 미나 씨가 그려져 마음이 시리기도 했다. 3주 후에 수강생들에 선물할 한국 사탕을 한 가방 안고 그녀가 돌아왔다. 한국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했다.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별 수 없이 영어를 섞어 대화했다며 아쉬워했다. 나도 안 가본 혼밥 가능한 식당들을 찾아다녔는데, 의외로 맛있고 분위기가 좋았다고 몇 곳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준비 없이 오른 등산길에 만난 등산객들에게 간식을 얻어먹은 이야기를 할 때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아 보이며 그때의 따뜻함을 전달했다. 그리고 부산의 그 주소지를 찾았던 이야기를 했다.
“그곳을 찾아갔더니 정말 사거리가 있었어. 나는 그냥 거기 한참 서 있었어. 그곳에 가면 슬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 그냥 어쩐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어. 편안하고 후련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서있는데 부동산 여주인이 나와서 뭘 찾는지 묻더라고. 그래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나를 안으로 안내하고 앉아 쉬다 가라고 해 주었어. 그 사람의 말로는 이제 곧 그곳은 모두 헐리고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온대. 지금 그곳을 찾은 게 너무 다행이지. 고층 건물들로 가려지기 전에 내가 그곳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미나 씨는 치마를 살짝 들어 종아리 아래쪽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남겨졌던 장소의 예전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문신을 50이 넘어 한국에서 한국어로 하게 되어 좋았다고 했다. 주소를 찾아주어 고맙다고 나를 한번 안아주었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을 흘렸고, 그녀를 향해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입양에 대해 알았다. 가난한 집들이 모여있던 우리 동네에 입양 가기 전 아이들을 임시 보호하는 집들이 몇 있었다. 갓난아이가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서너 살 되는 아이들이 오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간다고 들었다. 그때 가난했고, 그 가난으로 황폐해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 인해 눈에 늘 두려움을 담고 있는 어머니와 살았던 나는 가끔 나도 저 아이들처럼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어릴 때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 가난한 동네의 풍경도 떠오르지 않는데, 그때 내 그 바람만은 입양인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좀 더 선명해진다. 나는 내 그 바람이 미안하다고 미나 씨에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고, 한 때 그들을 부러워했던 철없음에 대한 미안함이고, 부러움을 가질 만큼 그들에 대해 몰랐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고, 이후 비행기를 타고 떠난 아이들에 대해 한 번도 다시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학기를 마무리하며 수강생들과 한국 식당에서 소소한 파티를 했다. 미나 씨는 오삼 불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이미 다음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어서 한국어를 배워서, 누구 하고나 자유롭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이 남겨졌던 곳의 주소를 몸에 새기고 50이 넘어 태어난 나라의 말을 배우는 미나 씨와 또 다른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나는 알지 못했던 나의 나라를 배운다. 나았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한 나라를 알고 싶어 하고, 마주하고 싶어 하는 그들은 이제 내 나라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비록 대단치 못한 강사이지만, 떠올리면 위안이 되는 우리말 문장 하나쯤 그들의 마음에 새겨주는 선생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