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는 한글학교가 있다.
타지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우리말 교육을 하는 학교다.
매주 토요일 학년별로 모여 한국 아이들과 똑같은 국어 교과서를 가지고 읽고 쓰는 법을 익힌다.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해서도 배운다.
아이에게 대한민국, 엄마 아빠가 나고 자란 나라를 들려주고 심어주길 간절히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글학교 입학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첫째. 한글학교는 토요일에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노는 날이다. 밖에 나가 놀고 구경도 하고 집에서 뒹굴기도 하는 일주일 중 제일 많이 크게 웃는 날이다. 한글학교에 가게 되면 이 즐거운 토요일은 이제 전혀 다른 모양을 갖게 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나는 아이와 한글학교 다닐 생각을 하며 좀 답답했다.
둘째. 너무 멀다. 밀라노 남쪽 변두리 동네까지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한 시간 반, 많이는 두 시간까지 가야 한다. 노래하는 아빠는 주말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고, 엄마는 자그마치 무면허인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오고 가는 동안 우리 둘이 지치지 않을까.. 심난하다.
셋째. 수업하는 4시간 동안 도서관도 하나 없는 조그만 동네에서 나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사회성이 극히 취약한 나는 모르는 엄마들을 사귀거나 혹은 안 사귀거나 하면서 4시간을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릴 생각에 앞이 캄캄하다.
넷째. 비싸다. 정부에서 후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여하튼 학비로 운영되는 학교다. 모두 나처럼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준에는 비싸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학교는 보내야 할 것 만 같았다.
첫째. 내가 아이에게 읽고 쓰는 것을 제대로 가르칠 자신이 없다. 가르치다 분명 싸울 것이고, 재미없고 귀찮아서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하다 포기할 것이다.
둘째. 아이는 이태리 초등학교 다니면서 엄청난 식욕으로 이태리 어휘들을 섭취하는 중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서 우리말의 자리는 점점 작아진다. 지금. 교과 과정을 통해 우리말 어휘도 함께 익히면 우리말과 이태리어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잡힐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셋째. 아이가 평소 좋아하는 언니들이 다닌다는 한글학교를 아이가 선망하고 기대하고 바라고 있다.
"이제 학교 들어갔으니까 한글학교도 갈 수 있어. 가볼까?"
"응, 가야지."
"그럼, 우리 한번 가서 해보자. 해보고 괜찮으면 계속 다니기로 하고, 아직 힘들거나 재미없으면 다음에 다니기로 하자."
"응, 알았어. 그런데 나는 재밌을 것 같아."
아이는 학교 입학 때처럼 잔뜩 긴장했고, 나는 조금 쭈뼛거렸다.
짧은 입학식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 말씀과 담임 선생님 소개, 교가 합창, 그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
엄마나라 말을 배우러 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그 사이 조그만 우리 아이도 있다. 이태리 학교 입학식이랑도 다르고 내가 어릴 적 경험했던 입학식이랑도 다르다. 모두 다른 이유로 이태리에 와서 또 다른 이유로 이곳에 남은 엄마 아빠들은 나처럼 서서 아이들을 바라본다.
참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글학교에서는 그저 먼 나라에 와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우리말을 새겨 주려는 같은 열심을 가진 부모들이다.
이태리 말을 우리말보다 잘하고, 파스타를 밥보다 자주 먹는 아이에게 굳이 우리나라 사람일 것을, 나랑 같은 나라 사람이기를 바라는 내 욕심이 덜 외롭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우리나라 사람이 됐으면 하는 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사람인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우리말로 다투기도 하고 속 얘기도 하는 모녀이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가사도 모르는 교가를 흥얼흥얼 나도 따라 불렀다.
아이를 교실로 들여보내고 가을이 물들어서 알록달록한 나무들이랑 같이 조금 걸었다.
ㄱ ㄴ ㄷ ㄹ, 가나다라마바사... 괜히 되뇌면서 걸었다.
언제쯤 아이가 우리말로 글씨를 쓰게 될까? 한글학교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지낼까? 나중엔 한국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촌들이랑 메시지도 주고받을 수 있겠구나. 어쩌면 내가 읽는 책을 같이 읽을 수도 있겠구나.
조그만 동네 커피숍에 앉아서 아이의 첫 한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책도 읽고 멀리서 일하는 노래하는 남편과 통화도 했다.
갈 곳도 마땅치 않고, 할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혼자 밖에서 심심한지가 얼마만인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는 심심함에 젖어 문득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학교 끝나는 시간이 되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어땠어?"
"진짜 재밌었어."
"뭐 했는데?"
"공부했지. 글씨. 나 할 수 있다. 봐봐.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파하!!!! 잘하지?"
"응, 진짜 잘한다."
"어떤 친구는 벌써 다 읽을 수 있어. 어떤 친구는 나처럼 못 읽고. 나도 배우면 읽을 수 있다고 했어. 그렇지?"
"응, 그럼, 당연히 배울 수 있지. 그런데 토요일 학교 오니까 피곤하지 않아? 한글학교 다니는 거 괜찮겠어?"
"응, 괜찮아. 그리고 한글도 배워야지. 나도 글씨 읽을 수 있어야 되잖아."
"응, 그렇지"
이렇게 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지난주와 같은 앞으로의 토요일들과 이별했다. 이제 심심하고 피곤하지만 감격스러운 토요일을 만날 것이다.
밀라노 남쪽 변두리 마을에 어설픈 우리말을 하는 꼬마들의 작은 우리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서 아이는 내가 미처 가르쳐 주지 못하는 우리나라, 우리나라 사람, 곱고 예쁜 우리 땅에 대해 배우길 바란다. 엄마 아빠가 태어난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친구들을 만나 비슷비슷한 고민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밀라노에 한글학교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