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2022)
다이애나는 길을 잃었다. 그것도 자기 고향에서. 작은 다이닝에 들어가 "여기가 어디죠?"라고 묻는 장면은 다이애나의 현재 상황을 함축한다. 다이애나는 길을 잃었고, 다이애나의 내면도 길을 잃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아직도 여전히 왕세자다)와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다, 파파라치를 피해 달아나던 도중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야 했던 민중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 <스펜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몸을 빌려 크리스마스이브에서 박싱데이까지 사흘간의 다이애나를 그린다. 한 인물을 그리는 영화는 인물의 일대기를 쭉 따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인물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을 집중해보거나 인물이 자리했던 어떤 특정한 순간들에 집중할 수도 있다. <스펜서>가 선택한 전략은 가장 마지막 것으로 보인다. 다이애나의 일생을 돌아보기보다는 비교적 짧은 3일의 시간에 집중해 다이애나가 겪었던 심리 상태를 보다 내밀하게 묘사하고 체험시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느껴진다.
<스펜서>의 많은 시각적 요소는 그 내면을 상징화하고 외면화 하는 데 집중한다. 외도를 저지른 무심한 남편이 내연녀와 다이애나에게 똑같이 선물한 진주 목걸이는 그대로 다이애나의 숨통을 조여 오는 불편함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자동차들이 아슬아슬하게 그 옆을 지나가는 꿩의 사체는 극 중 다이애나의 언급을 통해 다이애나의 처지와 동일시됨을 알 수 있고, 답답하게 방을 둘러싸고 있는 커튼, 헤진 채 허수아비에 걸린 아버지의 재킷, 바닥이 무너져내리는 다이애나의 고향집까지 모두 그 자체로 무엇이 되기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보인다. "A Fable from a Tragedy"라는 영화의 첫 자막처럼 <스펜서>는 온갖 상징 관계를 동원해 다이애나의 비극을 하나의 우화처럼 담아내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스펜서>가 역사와 현실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주관적 체험이 된다는 점이다. 다이애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갖고 나온 불안과 위태로운 정서들을 외부 세계의 사물들에 하나하나 담아낸 것과 같은 느낌의 영화다. 불협하듯 소리들이 조화할 생각 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이 주변과 불협하고 있는 위태롭고 불안한 다이애나의 내면을 더욱 강조한다. 스산한 멜로디가 이어지다 다이애나가 별장에 도착하고 타이틀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또 다른 선율이 연주되면서, 두 선율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하는 듯한 영화의 도입부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와 불안은 종종 <스펜서>를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느끼게도 만든다. 다이애나가 스산하게 무너져가는 폐가에 방문해서 귀신을 마주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기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영화가 다이애나의 공포영화 같은 삶의 통증을 시각화하고 경험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 상당 부분 성취를 이뤄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상징을 활용하고 있는 방식이나, 끝내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다이애나 스펜서'로 거듭나며 전통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다소 직설적이고 상투적인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패션쇼를 하듯 옷을 바꿔 입고 저택을 누비며 춤을 추고 달리는 다이애나의 몽타주는 아름답지만 스스로 과시하듯 자신이 하이라이트임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라는 노래가 나오며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다이애나와 두 아들의 모습은 내내 영화가 취해온 태도를 떠올려 보면 다소 안전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한 인간의 내면을 길어 올린 화면과, 그것을 길어 올리고 있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볼 이유가 있다. 다이애나가 입었던 옷들과 다이애나의 헤어스타일의 고증을 통해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면에서부터 다이애나를 연기해낸다. 옭아매진 내면을 그리고자 하는 라라인 감독의 목표는 크리스틴의 연기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약하고 위태로우며 불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중심을 갖고 있는 다이애나를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의 육체를 경유해 스크린 위에 그려낸다. 아름답게 수놓아지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습과 화면은 비극과 대비되며 처연하고도 위태로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다이애나와 왕실, 비극적인 이야기와 아름다운 화면, 이따금씩 충돌하는 선율들, 어쩌면 <스펜서>는 이 불협화음들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