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기반 육아 strength based parenting
어떤 모임에서 친해진 한 분이 있다. 생각도 비슷하고 늘 노력하는 모습이 본보기가 되는 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럴까.
딱히 이유를 찾아보려고 해도 그분 자체에서는, 지인과 나의 관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그분이 큰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다.
그 아이는 조금 느리고 둔한 아이였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라 얼마나 느린지는 모르겠다. 다만 빠릿빠릿한 동생들에 비해 시간이 걸리고 눈치가 좀 느린 것처럼 보였다.
지인과 그 아이의 기질이 맞지 않아 보였다. 지인은 아이를 답답해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궁합이 있을 테고 또 내가 본 것은 자녀 양육의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으므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인과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의 해소되지 않은 어느 부분이 건드려진 것이었다.
그것이 지인을 내가 불편하게 여긴 지점이었다.
으레 우리 어린 시절 집안 환경이 그렇듯 아빠는 바쁘고 엄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엄마를 중심으로 모였다.
우리 집도 그랬다.
아빠는 바쁘고 성격이 강했고 어린 내게 적군같은 느낌이었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는 아군의 한 축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축에서도 힘의 불균형이 일어났다.
동생과 엄마는 기질이 비슷했다. 눈치가 빠르고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잘 통했다.
아들이고 막내라 이뻤던 것도 있었겠지만 지금 봐도 둘의 성격이 비슷하다. 오히려 나는 아빠 쪽의 성격을 더 닮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보니 적군이라 생각되었던 아빠가 더 많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느리고 굼뜬 눈치 없는 난 늘 지적의 대상이었다.
나를 미워해서도, 무안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가족이 악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매우 전적으로 악하지 않다. 아마 걱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그런 기질이 편하고 우위에 있었고 어린 나에게 절대적 우위에 있었던 엄마의 질책은 나 역시도 스스로를 나는 그런 면이 부족한 사람, 인간관계가 서툰 사람,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각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나는 눈치가 없는 애도 아니었고, 마냥 느리고 굼뜬 아이도 아니었다.
인간관계는 좋은 편이었고, 오히려 동생보다 좋은 인간관계로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을 했더니 더 이상한 세상이 펼쳐졌다.
나보다 더 느리고 굼뜨고 속 터지는 남편을 그저 어머님은 잘한다 하셨다.
나 보고도 너는 어쩜 이리 센스가 좋니.. 너는 옷을 골라도 이쁜 것만 사는구나.. 이러셨다.
이상했다.
우리 엄마는 항상 이런 거지 같은 옷 사지 말고 하나라도 제대로 된 옷을 사라고 했는데
어머님은 내가 산 것은 다 이쁘고 너는 참 야무지고 똑똑하다 하셨다.
처음에는 그런 어머님이 낯설어 의심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닐까.
이럴 리 없잖아.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지? 나중에 변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나를 믿지 못하는 못난 마음으로 어머님의 좋은 마음을 못 받아들였다.
(어머님은 결혼 10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매우 좋은 분이다. 이제야 그분의 진심을 안다.)
껍질을 깨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아이가 아니었고, 그동안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일 먼저 화가 치미는 대상은 엄마였다. 화도 내고 스스로 다스리기도 하고 분리도 하고 늙어가는 엄마를 보며 엄마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음 이해하는 지난한 세월이 흘러갔다.
동생은 항상 애정의 대상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사이 좋은 남매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동생 앞에 서면 여전히 무언가가 "불편했다". 그리곤 그 감정을 외면했다.
동생이 불편하다니 내가 이상한 것 아니야?라는 감정이 더 앞섰다. 살갑고 잘 챙기는 동생을 불편해하는 스스로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동생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나는 "과시"하고 있었다.
어릴 때 엄마가 너를 옳다고 했지만 지금은 어때? 내가 더 잘 나가지? 엄마랑 너가 틀린 거야.
엄마에게는 "분노"를, 동생에게는 "과시"를 남겼다.
그리고 나에게는 뭐가 남았을까.
그래서 시원해졌을까...
가까운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나를 찌른다.
그 반작용은 더 깊고 더 날카로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게 찔린다.
찌르는 사람도 찔린 사람도 비극이다.
느리고 굼뜬 아이라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느리고 굼뜬 아이는 그 상처도 느리고 오래 가지고 간다.
아이들의 "강점 strength"를 보자는 취지의 원고를 쓰고 있다.
느리고 굼뜬 아이라 걱정하지 말고 사려 깊고 신중한 아이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이 감히 재단한 느리고 굼뜬 아이가 나처럼 오래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이 원고를 쓰는 나의 자그만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