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아재 바라아재 24화

24화 - 변색

by 시드니


'저벅저벅'

염색물에 한번 담궜다가 덜말린 것같은 옅은 밤색 죄수복을 입고 힘없이 걸어가는 한 남자.


비록 죄수복이지만 훤칠한 키와 벌어진 어깨를 가릴 수는 없다. 숨을 들이킨 듯 살짝 올라와 있는 그의 가슴팍에 햇빛이 내리 쬔다.


"3067"

햇빛 반사로 인해 도드라지던 수감번호, 해가 자리를 바꾸면서 구치소 창살 사이로 내려쬐던 빛이 그의 얼굴로 이동한다.


한지가 구겨지듯 부드럽게 인상쓰는 공민우. 빛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꼬리를 힘겹게 들어올린다.

왜인지, 슬퍼보이지 않는다.


공기조차 철맛이 날것 같은 이곳에서.



***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사무실에 등장하는 한 여자.

퇴원 후 며칠 휴가를 내고 복귀한 남다름.


"안녕하세요."

"오! 다름이 왔어? 괜찮아?"

"다름씨. 괜찮아? 어때?"

"괜찮아요.헤헷."


다름이 부서 쪽으로 가기도 전에 다름을 둘러싸는 많은 사람들. 아무래도 신임 사장과 함께 입원을 했던 터라 더 관심이 쏠린다.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더미에서 겨우 벗어나 자신의 부서인 '인사이트부'쪽으로 향하는 다름.


다름이 보이자마자 버선발로 달려나오는 부장.


마부장 "다름씨!! 괜찮아? 아이고.. 더 쉬지."

남다름 "아니에요. 많이 다친것도 아니고."

김과장 "다들 많이 걱정했다야. 괜찮은거야?"

남다름 "네네! 걱정마세요. 헤헤..."


머쓱하게 자리에 앉은 다름. 출근하자마자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부터 한다. 홈페이지 중앙에 떠있는 인사발령문. 누구의 발령문인지 알것 같았다.


"인사발령문...

한아름 대리....

스페인지사 즉시발령...."


민규의 배려였다. 아무리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지만 회사에서 한동안 소문이 돌테고 2차피해가 우려되니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지역에 배치해줬다.


남다름 "다행이네."


"부장님들! 오전회의 합니다."

본부장 비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고, 마케팅본부 부장들이 일시 소집된다. 다름은 본부장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것을 잊었다는걸 깨달았다.


'째깍째깍'

본부장, 실장, 부장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시계를 보면서 그앞을 주시하고 있는 다름. 눈치없는 부서 아재들이 집중력을 흐리게 만든다.


심대리 "다름씨, 주간보고 낼거 있어?"

김과장 "야... 너는... 병원갔다 온 애한테 보고서 달라고 하니?"

심대리 "아,,, 저는 그냥 혹시 넣을게 있나해서..."

김과장 "요즘에 내가 좀 참았는데 말이야, 너.."


휠체어, 강가사건 잊으셨나. 김과장이 슬슬 시동을 건다.


남다름 "아! 주간보고~~ 아마 있을거에요! 취합한거 저 보내주시면 제가 추가해서 기획부에 보낼게요!!^^"


본부장님에게 인사를 해야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다름. 괜히 부서가 시끄러워져서 인사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때, 본부장실에서 우르르 나오는 부장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본부장실도 달려가는 다름.

달려가는 다름 앞에 환한 미소로 응답하는 마부장.


마부장 "다름! 바람 좀 쐬고와."

남다름 "네?"

마부장 "다음달에 본부 야유회 갈건데, 본부장님이 다름씨 바로 일시키지 말고 양평가서 바람쐬고 오라고 하시네."

남다름 "양평이요?"

마부장 "응. 양평 세미원. 1층에서 기획부 안과장 기다리고있을거야. 빨리 가봐."



***



"아, 인사를 했어야했는데."

오랜기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고 그동안 많이 챙겨준 본부장이라 꼭 인사를 했어야했는데, 다름은 괜히 찝찝하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서 1층 로비로 내려가니 마케팅기획부 안경태 과장이 설렌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안과장은 45살로, 아직 결혼하지 않는 노총각이다. 회사에 노총각은 많지만 다른 노총각과 달리 눈이 매우 맑다. 그 맑고 깨끗한 눈으로 여직원들을 뚫어지게 쳐다봐서 몇번 감사실에 가긴 했지만...


남다름 "과장님 안녕하세요~"

안경태 "어, 다름씨 안녕?"

남다름 "출발하실까요?"

안경태 "응? 어디를 출발해?"

남다름 "아... 오늘 본부 야유회 답사가시는거 아니에요?"

안경태 "뭐? 다름씨가 가는거야? 나는 마케팅커뮤니케이션부 가을씨가 오는줄 알았는데...."

남다름 "아... 죄송해요. 저더러 가라네요."


크게 실망한 표정의 안과장. 온몸에 힘이 빠진 채 힘겹게 걸어간다. 고개를 너무 숙여서 쓰고 있던 안경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까지 실망한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다름도 비슷한 감정이므로 마음에 두지 않는다.


***



안경태 과장의 차안,

다름은 무한도전 토토가 콘서트에 온줄 알았다.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빠빠빠빠빠~"


안경태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

90년대 음악을 틀고 온몸을 흔들며 흥겹게 운전을 하는 안과장. 뮤직큐와 함께 세상 모든 시름을 다 잊은 것같아 다름도 기분이 좀 풀렸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풀린 것 같아 다름이 대화를 나누려는데,,,

남다름 "과장님, 세미원은 가보셨..."

안경태 "ㅇㅇ?"

남다름 "으악!!!"


다름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름의 목소리에 그녀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경태 과장의 안경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까만 선그라스를 끼고 정색한 안경태 과장의 모습은 흡사 맨인블랙에 나오는 외계인 같았다.


남다름 "과장님... 안.... 안경이...."

안경태 "응? 안경? 아~~ 이거. 변색 선그라스야."

남다름 "변... 변색 선글라스요?"

안경태 "응응. 이거 평소에 안경이다가 햇빛이 세거나 강한빛을 받으면 까만색으로 변해. 눈보호를 잘해줘."

남다름 "아.... 그렇군요...."


다름은 병원에 한번 더 입원하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변색 선그라스라니, 너무 아재스러웠다.


세미원에 도착한 안경태 과장과 다름은 입장료를 끊고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안경태 과장은 세미원에 있는 공기는 모두 흡입할 것처럼 풍경에 취해있었다.


본부 야유회 답사시에는 안전을 확인하는게 가장 중요했다. 세미원은 안전상으로 문제는 없어보였다. 안전만 문제가 없는게 아니라, 우리나라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물이 만나는 지점은 평화롭고 호연지기를 느끼게 해줬다.


유일한 단점은 이 좋은 곳에 저분과 함께 한다는 것.



***



답사 후 돌아오는 차안, 세미원에서 한시간 내내 안과장의 피사체가 된 다름은 피곤했다.


사진 스팟마다 그가 시키는 포즈와 표정을 지어야했던 다름. 야유회 답사를 다녀오는 일은 바람쐬고 오라는 본부장의 의도와 정확히 어긋나는 격무 중에 격무였다.


안경태 "다름씨, 즐거웠어. 다음에 또 같이 가."

남다름 "네? 아... 네...."


'내가 왜?'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다름.

안경태 과장 차에서 내리고 1초 후, 핸드폰이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한다.


'카톡카톡카톡'


100장이 넘는 사진을 다름의 카톡에 보내는 안과장.


그가 결혼을 못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것 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양평에서 내내 기가 빨려서인지 잠시 1층 카페에서 쉬었다가 올라가려는 다름. 소파자리에 앉아 카페인을 충전하고 몸에 힘을 빼버렸다. 눈도 스르르 감기는데...


"이거 놓으세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 눈을 뜨는 다름. 까만 마스크를 쓴 한 여자와 경비원들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다.


한 여자 "이거 놓아요! 이 놈년들 가만 안둬!"

경비원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쪽으로 가시죠!"


여자의 목에는 큰 피켓이 걸려있었다. 회사에서 억울하게 잘리신 분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피켓내용을 찬찬히 보는 다름. 눈이 휘둥그레 진다.


"우리 가정 파탄 낸 두년놈이 물고 빠는 동안 우리 딸은 애보랴 살림하랴 온몸이 망가져갔는데,,,, 두년놈이 멀쩡히 회사생활하게 두는 세하그룹는 양심도 없는 회사입니까?!!"


사내 불륜이었다.


2011년에 입사한 다름은 종종 사내불륜을 목격하곤 했다. 회사로 찾아오는 가족분들은 많이 봤는데, 피켓시위는 처음봤다.


장모님으로 추정되는 여자분과 경비원들의 몸싸움이 심해지는 것 같아 마시던 커피를 들고 그쪽으로 다가가는 다름.


남다름 "저... 저기!"


'탁탁탁탁'

그때, 다름의 눈에 멀리서 우사인볼트처럼 뛰어오는 차경우의 모습이 보인다.


차경우 "그 손 떼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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