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상실의 시대
"찾았다."
자신의 SNS비밀계정을 열어 과거 게시물을 찾던 다름.
풍경사진, 음식사진 사이에 떡하니 존재감을 드러내는 묵직한 책이 포슬포슬한 드라이플라워와 함께 어우러져있었다.
***
4년전, 다름은 세하그룹 지주회사격인 (주)세하 전략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다름의 업무는 모든 자회사의 실적을 수집하는 일. 각 자회사의 전략담당자와 일을 하고 있었다.
남다름 "세하음료, 세하웰니스, 세하식품, 세하제약... 자료 다 들어왔는데. 세하맥주 아직 안들어왔네?"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세게 꾹꾹 누르는 다름.
남다름 "안녕하세요. (주)세하 전략관리부 남다름입니다. 강대리님 자리 계신가요?"
강대리 "네, 접니다."
남다름 "대리님 안녕하세요. 이번 월 실적자료, 세하맥주만아직 안들어와서 연락드립니다."
강대리 "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도 영업에서 자료가 안들어와서요. 들어오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남다름 "네. 꼭 부탁드릴게요."
시간이 흐르고, 4시가 되도 5시가 되도 퇴근시간인 6시가 되도 기별이 없다.
"오늘 또 늦겠구만."
모두가 퇴근한 시간, 식권 한장과 책한권을 들고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다름. 밥먹고 책 좀 읽고 있다가 야근할 생각이었다.
음식을 받아들고 테이블을 찾아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옆에 앉을까, 말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그의 앞에 앉는 다름.
남다름 "강대리님? 앉아도 될까요?"
이어폰을 끼고 야구중계를 보고 있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입에 음식물을 한가득 물고 '네'라고 대답하는 남자.
남다름 "야구 보고 계세요? 어디 팬이세요?"
강대리 "저는... 롯..롯데팬입니다."
응원하는 구단을 말하면서 눈치를 보는 강대리.
남다름 "아..."
강대리 "기아팬이세요?"
혹시나 다름이 기아팬일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강대리.
최근에는 좀 덜하지만 한국야구에서 기아와 롯데는 영원한 숙적이다.
남다름 "아니요. 저 야구 잘 몰라요."
강대리 "아... 그러시군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대리 "저 땜에 야근하시는거죠?"
남다름 "네...뭐.. 그렇다고 봐야죠. 내일 이사회라서 다들 비상모드거든요."
강대리 "아.. 죄송합니다. 영업본부 자료만 받으면 되는데, 거기도 밤에 회식자리가 많아서 아마 회식끝나고 사무실 들어와야 자료를 보내줄거에요. 이거 다름씨한테 많이 미안하게 됐습니다."
남다름 "어쩔수 있나요."
강대리 "그래도 미안하니까, 제가 커피한잔 살게요."
식사를 마치고 로비 카페에 앉아 있는 두사람. 젊은 남녀가 마주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회사 사람들이 흘끗흘끗 보고 지나간다.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로 있는 다름. 강대리도 어색한지 주변만 두리번 거리고 있다.
다름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입을 떼는데, 남자가 먼저 선수를 친다.
강대리 "하루키... 좋아하세요?"
남다름 "아....네....가장 좋아하는 작가에요."
다름이 들고 나온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였다. 당시 서점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베스트셀러.
남다름 "대리님도 좋아하세요?"
강대리 "음... 저는 허무, 염세 이런건 별로 안좋아해서요. 미야베 미유키 같은 추리소설이 재밌더라고요."
남다름 "하하. 맞아요. 하루키가 그런면이 있죠. 요즘 시대랑 맞지 않은 면이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루키 좋아하게 된게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거든요."
강대리 "상실의 시대... 책 표지만 알지 읽어본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남다름 "저도 그러다가 예전 남자친구랑 헤어진 다음날 보게 됐는데, 미도리라는 캐릭터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을 보고 작가를 좋아하게 됐어요."
다름은 아차, 했다.
회사사람에게 굳이 전 남자친구 이야기 꺼낼 필요가 없는데. 남의 연애사는 언제나 흥미로운 법인지 강대리가 몸을 앞으로 바싹 기울였다.
강대리 "무슨 내용인데요?"
남다름 "여자가 생각하는 완벽한 사랑에 대한 거에요. 딸기치즈케이크, 쇼트케이크가 등장하는 내용인데... 남자가 딸기케이크를 사오면 여자가 그걸 창밖으로 던져요. 그럼 남자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부분이거든요. "
다름은 또 아차,했다.
이런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회사사람과 해야하는건가.
남다름 "음음. 어쨌든 제가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고. 여자로서 공감됐어요. 그 뒤로 하루키에 빠져살았던 것 같아요."
강대리 "그렇구나. 완벽한 사랑...."
회사에서 '완벽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다니.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이 숫자만 보는 전략부 사람들끼리.
"굉~굉~굉~"
로비 1층 시계가 9시를 알리고 있었다.
남다름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오늘 자료 받는건 틀렸겠죠? 그냥 새벽에 나와서 할까봐요."
강대리 "제가 영업부에 다시 전화할게요. 9시까지 준다고 했는데."
각자 사무실로 돌아온 다름과 강대리.
다름은 책상에 앉아 '1Q84'를 폈다. 책을 한창 읽다가 골아 떨어져버린 다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사무실 전화기가 울린다.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는 다름.
남다름 "네! 전략관리부 남다..."
수화기 너머 '보냈습니다'란ㄴ 목소리가 들리고 '야호!'를 외치는 다름. 그러다 모니터 하단에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다.
남다름 "어머! 벌써 12시?"
***
짐을 챙겨 우다다다 달려나오는 다름.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이라 잘못하면 택시타고 가야한다. 예전에 택시를 타고 가다가 이상한 기사를 만난 적이 있어 가능하면 지하철을 타려고 한다.
쿵쾅거리며 로비를 가로지르는 다름.
그때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채는 한남자.
"데려다줄게요."
강대리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작되었다.
***
"그래서 어떻게 만나신건데요?"
민규가 재차 묻는다.
남다름 "아,, 뭐,,, 어쩌다가 그렇게 됐죠 뭐."
그때 만약 강대리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감히했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랑 만났을까.
김민규 "재밌는 스토리 기대했는데."
남다름 "별거 없어요. 그냥 잊어버리고 싶을뿐."
김민규 "푸하핫."
배를 잡고 웃는 민규. 파안대소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저런 어린 아이와 잠시 '사랑'을 생각하다니 다름은 갑자기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인사를 하고 자신의 병실로 내려가버리는 민규.
다시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보는 다름.
'상실의 시대'
드라이플라워와 어우러져 있던 책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강대리가 다름에게 고백하던 날 선물한 책이었다.
다름에게 책을 건네주며 강대리가 건넨 말은
"치즈케익 사줄까요?" 였다. 다름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기분이 좋았어야하는 상황인데, 다름은 솔직히 당황했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상실의 시대'를 선물하다니.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가장 유명한 책이 없을까봐.
이렇게 센스없는 남자인줄 그때 알아차렸어야했는데.
"카톡카톡"
핸드폰 화면에 메시지가 뜬다. 세나다.
이세나 '선배님! 괜찮으세요?'
남다름 '응 괜찮아. 고마워.'
이세나 '진짜 걱정 많이했어요.'
남다름 '주말동안 쉬면 괜찮을거야.'
이세나 '월요일에 출근하시게요?'
남다름 '응. 할일이 있어서. 참, 세나야."
다름은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남다름 '민우선배는, 어떻게 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