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
보통, 다른 나라에 ‘이민’ 간다고 하면 꼭 필요한 것이 ‘비자(영주권)’일 것이다. 일정기간 체류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비자도 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이 땅에 제대로 발 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영주권’이라는 비자가 꼭 필요하다. 이 것을 얻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가 이 땅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외국인이라고 가정했을 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이 땅에서 공부하고 이 나라가 원하는 인재가 되어주는 것이다.
말이 쉽다.
‘이 나라가 원하는 인재’는 이 나라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일을 해주는 영어 잘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부족직업군에 있는 직업을 가진 숙련된 기술자가 나(고용주)랑 말도 잘 통해야 한다는 말씀. 부족직업군은 매년 이민성에서 발표하는데, 몇 가지 직업군이 들어왔다 빠졌다 하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 그때도 하기 싫은 일은 지금도 하기 싫은지 매번 비슷하다. 한국에서 흔히들 기피하는 직업들이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직업군은 한국에서도 모셔가기 바쁜 직업군(의사, 간호사, 변호사, 선생님등)이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필요한 영어점수가 달라지지만, 영어는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 숙련된 기술이 있어도,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점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이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민자들을 받는 다른 나라(캐나다, 뉴질랜드)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직업 군은 셰프, 용접공, 타일러, 목수, 회계사, 간호사 등이다. 특히, 셰프, 용접공, 타일러 같은 직업 군은 일을 배워 숙련되기까지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일을 해서 생활비를 충당해 가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선택한다. 그런데,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원어민과 대화하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또, 핑계를 대자면,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체력적인 여유가 없어 쉬는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
또 생활비에 학비까지 주기적으로 내야 하니, 가난한 유학생 삶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늘 피로도가 높다. 덧붙이자면, 호주의 최저시급은 세계최고 수준으로 높지만, 법정근로시간이 1주일에 38시간이기 때문에 시급이 높아도 정규근로시간만 근무한다면 웬만한 숙련자가 아니고서는 윤택한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특히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투잡, 쓰리잡이 필수다. 그래서 만약, 어딘가에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짧으면 4년 길면 10년, 그 이상 까지도 버텨야 하는 경우의 수가 생기니 체력은 필수라고 전해주고 싶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내가 지금껏 한국에서 이 정도까지 노력을 기울였던 일이 있었었나? 아마, 한국에서 이 정도로 열심히 살았으면 어디 모처에 작은 아파트 하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영주권을 따고 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대답을 한다.
“그란트레터(비자승인메일)를 받은 그 순간, 그날은 너무 기쁘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예요. 그 뒤엔,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남들보다 뒤처진 날들을 커버하려면 훨씬 더 열심히 살아야 해요.”
나도 역시, 머나먼 호주까지 날아와 텃새와 치사함들을 견뎌내고 ‘영주권’까지 받았는데 어제와는 다를 것 없이 사는 ‘나’를 보면서 현타가 왔다. 그것도 아주 세게.
영주권?
진짜 종이 한 장이다. "GRANTED" 이 글자가 적혀있는 메일 그 한 장을 얻기 위해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니.
영주권만 받으면 모든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 같았던 기대와는 달리 지금도 하루하루 연명하듯 살고 있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영주권만 받으면, 집도 사고 아이도 가지고 여행도 다니면서 여유롭게 '호주인들처럼'(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나 냉혹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 가며 괴로워하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 내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구나. 이러려고 여기 온건 아닌데...'
P.S. 호주에서 함께하는 동지들이 너무 영주권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기를…….
힘내라 얘들아. 이게 끝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