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심영의의 문학프리즘
오래 전 작고한 이청준 선생의 작품 중에「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서전과 회고록을 대필하면서 살아가는 대필 작가 윤지욱은 어느 날 문득 실체도 없이 언어를 부리는 자신의 글쓰기에 회의를 느낀다. 결국 인물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먼 자서전 대필을 포기하고, 자서전은 진정한 자기 성찰이나 고발에의 용기를 통해 과거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글쓰기라는 자각에 이른다. 그는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그 주인공을 스스로 신화화하거나 영웅시하기 마련이라는 것, 따라서 결국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비유컨대 화려한 동상 짓기와 다름없다는 것, 그러하니 지으려고 해서 억지로 짓는 동상은 거짓 표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 자서전의 원조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신을 향한 신앙고백서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고백록-Confessiones》(397-398)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인생관계의 지속적인 서술과 서술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이라는 의미에서 자서전의 단초가 된다. 그 후 자서전에 대한 본격적 관심이 시작된 시기는 18세기이다. 자서전의 이론과 변천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제여매(Je, Yeo-Mae)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고백을 표현하였다면, 18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서 ‘계몽주의 정신’과 더불어 근대적 자아의식에 기초한 자서전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많이 썼다. 그것의 긍정적 기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 서술의 빈 공간을 풍부하게 채우는 한편 후대로 하여금 크고 작은 도전과 시련에 맞서 나가는 긍정적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노령인구가 급증하면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일반의 욕망이 가세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부추기는 상업주의가 일정하게 섞여드는 풍경도 없지 않다. 아, 물론 누구에게나 그것은 나름의 의의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자서전을 쓰는가에 대한 명확한 자기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서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프랑스의 문예이론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이 그의 저서『자서전의 규약』에서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서전 작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자기 이름으로, 오직 진실만을 충실하게 고백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는 진정성의 원칙이다.
최근에 국정농단 사건의 공범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최순실이《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다고 한다. 전체를 읽어보지 않았으나 보도된 내용만 본다면,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무고한 사람이며 죄가 있다면 사심 없이 대통령을 보좌한 것 밖에 없다는 주장만을 내세우고 있는 듯 보인다. 의심받는 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가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다만 그 억울함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었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못 존재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인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지만 정작 임마누엘 칸트가 제기한 유명한 질문 세 가지 중에서 특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는 답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청준 선생이 그의 단편「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결국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스탠리 코언(Stanlry C0hen)의 말처럼, 무엇을 부인했다고 해서 부인했던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닌 것이다.(202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