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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Oct 05. 2015

1. 초록갓 아이스크림

1. 초록갓 아이스크림


 대한민국 서남부 지역에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한 시골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게 되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로 마을대표들이 모여 대안을 모색하였으니 대한민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을 어떠한 차별이나 조건 없이 모두 주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공표를 하게 된다. 즉 국제적인 모범마을로 만들어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전 세계에 활짝 외친 것이다. 그러면서 촌스럽던 마을 이름도 국제적으로 바뀌었으니 지금의 '롤리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어느덧 삼십 년이 지난 현재, 롤리마을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깜짝 놀라곤 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여기가 과연 한국인가 싶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같은 유럽의 작은 마을을 옮겨놓은 것 같은 외양에 수많은 기와집이 들어선 이곳은, 더 이상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중심부를 관통하는 대로변의 낡은 건물들에는 전 세계를 상징하는 상점과 식당으로 가득했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로 매우 북적거렸다. 그런데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유독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 장소가 딱 한 군데 존재하였으니, 바로 대로변 한가운데에 떡하니 둥지를 튼 롤리교회였다.


 갑자기 한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곳의 가라앉은 침묵을 쨍그랑 깨뜨렸다.      


“악,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토마스 목사가 두 손을 뺨에 댄 채 씩씩거리며 교회 벽 앞에 섰다.


 이전의 ‘토마스 바보’, ‘토마스 돼지’, ‘토마스 대머리는 너무 빛이 나 눈이 부시네’ 같은 낙서들은 아주 높은 교양을 지닌 아이들이 적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필 주일날, 그것도 예배시간을 채 30분도 안 남긴 시각, 교회당 문 바로 옆 흰 벽면 위로 이런 교양 없고 불경스러운, 분명 악령에 홀린 아이가 쓴 것이 틀림없는 낙서를 목격하다니.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돌연 숨이 안 쉬어져 졸도할 뻔했지만 겨우 벽을 붙잡으며 몸을 지탱했다.


 그를 경악시킨 낙서는 다음과 같았다.

 

 둥글게 그려진 목사의 대머리 위로 커다란 뿔 두 개가 뾰족이 나 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찢어진 입안에서 시뻘건 불이 마구 튀어나온다. 입 옆으로 그려진 대화창에는 다음과 같은 저주가 적혀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설교를 제일 열심히 듣는 자부터 먼저 잡아먹겠다.]


 목사는 손으로 낙서를 막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만 살짝 번질 뿐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이 전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급히 페인트를 보관해둔 창고로 직행하던 그가 창고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멈칫했다.


“아, 맞다. 페인트를 다 써버렸지. 사다 놓는 걸 깜빡했네. 이 일을 어쩌나?”


 그의 등허리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금이라도 페인트 가게 주인 춘삼에게 달려가 하나만 팔라고 애원해볼까?


 하지만 여기엔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춘삼이 독실한 신자로 주일에는 꼭 가게 문을 닫고 예배를 드리러 온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매우 독실한 그는 주일날 영업을 하는 것이 예배를 보러 오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늘 교회 맞은편에서 시끄럽게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들과 상점들을 무섭게 째려보곤 했다. 특히 그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장 경멸했다. 이런 그에게 어떻게 상점 문을 열어 페인트 좀 팔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목사는 습관적으로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간절히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여, 오늘 하루만 춘삼의 머리가 미쳐서 예배를 까먹고 가게 문을 열게 해 주시옵소서. 제발 그렇게 해주시옵소서.”


 만약 악마가 나타나 그렇게 해줄 테니 영혼을 파는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유혹했다면 그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바로 사인을 했을 것이다. 그는 십 분 넘게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주님은커녕 악마도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는 신도들의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별다른 도리가 없다 여겨지자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과 이마에 맺은 땀을 쓱 닦은 후,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낙서를 본 교인들이 그를 보자 낄낄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춘삼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보이지 않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쿵 떨어져 내렸다.     



 11시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회당 문이 활짝 열리며 30명 남짓한 교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에는 고동색 긴 생머리에 빨간색 외투를 입은 소녀 수진도 끼어있었다. 그녀는 눈을 아래로 향한 채 혹시 누군가가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네 아이들이 무리 지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새빨개졌다.


 롤리교회 예배당은 특이하게도 천장에 특수 장치가 설치되어 오늘같이 맑은 날,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목사의 대머리 위로 햇빛 직사광선이 반사되어 교인들에게 눈부신 광명을 선사해주었다. 설교만 좋았더라면 그가 전해주는 빛을 받으며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겠지만, 역시 하나님은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서 설교를 졸지 않고 듣는 자는 오직 저 독실한 페인트 가게 주인 춘삼뿐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설교 내용을 다 외우고 있는지 목사가 하려는 말을 몇 초 빠르게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의 옆에 앉았던 수진은 목사가 아닌 그의 설교를 들었다.


 특히 이날 교인들은 목사의 파란 눈동자가 유난히 불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기도와 찬송 중에도 계속 흘끔거리며 아이들을 한 명씩 노려보았는데 그만 우연히 고개를 쳐든 수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흠칫 놀라 그대로 온몸이 얼어버렸다. 가까스로 그의 눈길을 피한 채 그녀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전보다 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교회 마당에서 수진과 말자 여사를 발견한 토마스 목사는 마치 사냥감을 낚아채려는 표범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먼저 다가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사님, 오랜만입니다.”


“예, 목사님, 제가 감기에 걸려 거의 한 달쯤 나오지 못했어요.”


 여사의 말에 그는 걱정으로 표정이 굳어지는 척하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저런, 이제 다 나으셨죠? 연세가 있으시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합니다. 아주 지독한 ‘겨울’이란 악마가 곧 다가오니까요. 더욱 조심하셔야죠.”


 그의 입에서 악마란 말이 나오자 수진은 아까 벽 낙서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그는 그 웃음에 대한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어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지면서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흠흠. 여사님 손녀인가 보군요?”


“얘야, 인사드리렴. 내가 마을에서 제일로 존경하는 토마스 목사님이시다. 제 손녀 황수진이에요. 딸의 형편이 좀 그래서 제가 이곳으로 보내라 했어요. 온 지는 이제 일주일이 되었답니다.”


 황말자 여사는 미혼모인 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딸에게 늘 얌전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 때 가출한 딸은, 혼자서 수진을 낳고 서울에서 힘겹게 살고 있었다. 여사는 딸의 굴곡진 인생이 마치 자신의 것이나 되는 냥 부끄러웠고, 절대 손녀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앞으로 단단히 벼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막 도착한 그녀의 목에 미리 준비해둔 ‘순종’이라는 글씨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걸어주고 항시 목에서 빼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진은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걸긴 했으나 때때로 그것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았다.


 자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에 목사의 얼굴에는 주체하지 못할 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위엄 있는 목소리로 수진에게 말했다.


“롤리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앞으로 자주 보자꾸나.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제발 교회 묘지를 통과해 롤리숲으로 가지는 말아다오. 그곳을 아무리 뒤져도 그런 구멍은 절대 없어요.”


“그런 구멍이요?”


 말자 여사가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그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그건 말이다.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인데, 롤리숲 어딘가에 신비한 세상과 통하는 구멍이 있다는구나. 허나 사실 그런 건 없어요.”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사님. 꼭 보면 덜떨어지게 생긴 바보멍청이들이 그렇게 숲으로 가더군요. 제가 단언컨대, 여사님을 포함하여 똑똑한 아이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수진처럼 착한 아이는 절대로 신성한 교회 벽에 낙서를 하지 않을 거고요. 수진아, 오늘 설교를 얼마나 잘 들었는지 한번 물어나 볼까?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이 어디라고 했지?”


“네? 모세가... 계명을... 뭐라고 하셨어요?”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이 어디냐고?”


 불안감을 느낀 그녀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남겨둔 채 오랜만에 만난 이웃 쪽으로 벌써 걸어가고 있었다.


 목사는 마치 극악죄인을 추궁하는 저승사자의 눈빛으로 그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뭔가 대답이라도 해야 함을 느낀 그녀가 겨우 입을 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세가 살던... 동네 교회에서 목사님에게 받았겠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여기에 적지 않아도 똑똑하고 지적인 독자 여러분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사실 그는 여러분이 상상한 것보다 한층 더 일그러졌다.



 빨리 말을 마친 그녀는 할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이웃에 사는 순자 아주머니도 함께 계셨다. 그런데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통통한 얼굴에 심술이 가득 찬 소년이 어디선가 나타나 아주머니의 팔을 마구 흔들어대며 치렁치렁 조르는 것이었다.


"약속했잖아! 예배를 같이 봤으니 빨리 아이스크림 사 달라고! 어서!"


 아주머니의 아들 이상민이었다.


 아주머니는 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며 수진과 여사를 초대했고 그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밝은 가을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춘삼이 그토록 경멸하는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하였다.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아주 낡은 건물 1층에 그 가게는 자리하고 있었다. 초록색 갓 테두리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콘 두 개가 얹어진 그림과 그 옆에 고동색 가게 이름이 함께 적힌 나무 간판 밑으로, 눈사람 모양의 하얀 문이 달려있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의 허름한 문을 열자 달콤한 냄새가 먼저 그들을 맞이하였다. 안은 이미 줄을 선 아이들과 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연두색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에는 두 개의 액자가 달랑 걸려있었다. 그것들을 본 수진은 그만 킥 웃음을 터트렸다. 액자의 사진들이 너무 웃기고 괴상하기 때문이었다. 액자 아래 띠종이에는 각각 ‘김지만’, ‘해리 피넛’이라 적혀있었다. 순자 아주머니가 이 가게의 전 주인들이라며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김지만은 검은색 파마머리 위에 초록색 갓을 썼고, 양쪽 볼을 두 손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겨 눈, 코, 입 모두가 옆으로 길게 늘어진 형상에 검은 두 눈동자를 힘껏 한가운데로 모으고 있었다.


 해리 피넛 역시 그와 똑같은 초록색 갓을 썼는데 빨간색 곱슬머리가 갓 밑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작은 초록색 눈 사이 미간과 작은 콧등 위로 초콜릿 크림이 잔뜩 묻었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활짝 웃는 입술 아래 버젓이 드러난, 초콜릿이 까맣게 묻은 앞니 두 개였다.


 창가 테이블에 어른들이 앉고 수진과 상민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러 카운터로 가 줄을 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의가 없던 그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만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무 쏘아보자 오히려 손님들이 당황하여 그의 눈치를 살피며 허둥지둥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둘 사이가 아주 어색한 가운데 드디어 주문할 차례가 되었다.     


“신사 숙녀 분, 무엇을 줄까?”     


 검은색 곱슬머리는 마치 털실이 뒤엉킨 듯하고 생기 없이 까칠해 보이는 하얀 피부, 180센티의 큰 키와 듬직한 체구를 가진 현재 주인 박지원이 아이스크림 진열장 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구 부풀어 오른 검은 머리카락 위로 아까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은 초록색 갓이 비스듬히 써져 있었다. 갓은 많이 낡고 오래되어 여기저기 농도가 다른 초록으로 덧댄 흔적이 역력했다.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처음 방문한 수진에게로 향하였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지 진열장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그녀와 달리 상민은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주문에 들어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둘이랑요, 저는 늘 먹는 걸로 주세요.”


“오케이. 바닐라 둘, ‘레드점핑초코의 저녁식사’ 하나. 여기 숙녀 분은 뭘 줄까?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이사 왔니?”


“안녕하세요. 전 황수진이에요. 말자 여사님이 저의 외할머니 되시고요.”


“오호라, 그렇구나. 이렇게 귀여운 손녀랑 같이 계시니 여사님은 참 좋겠다. 자, 우리 가게에 처음 왔으니 오늘 공짜로 주마. 특별 메뉴 중에서 한번 골라봐라.”


 그는 슬쩍 옆으로 비켜서는 벽에 붙은 특별 메뉴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금 상민이 주문한 레드점핑초코의 저녁식사를 포함하여 총 4개의 특별 메뉴가 적혀있었다.      


    ‘레드점핑초코의 아침식사’   

    ‘레드점핑초코의 간식’

    ‘레드점핑초코의 저녁식사’

    ‘레드점핑초코의 야식’     


 메뉴의 이름들이 참으로 이상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원에게 물었다.


‘레드점핑초코’는 뭔가요?”


“아무리 물어봐도 나는 절대 설명해주지 않을 거란다. 뭔지 모르고 시켰는데 딱 등장했을 때의 그 기대감과 행복을 잔인하게 빼앗아오기 싫거든. 하하하.”


 그는 마치 8살 아이처럼 해맑게 깔깔거렸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는 싱글거리며 기분 좋게 제안했다.


“내가 하나 골라주면 어떨까? ‘레드점핑초코의 아침식사’를 권하고 싶구나. 숙녀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바로 떠주었지만 특별 메뉴는 약간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주었다. 수진이 어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넨 후 카운터로 되돌아왔다. 구석에서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던 그녀와 상민 사이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뚱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몇 살이야?”


“12살.”


 불현듯 그의 표정에 교활하고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난 너보다 두 살이 더 많아. 앞으로 차차 알게 되겠지만, 나는 이 마을의 골목대장이란 말이야. 다시 말하자면, 이 동네 아이들은 내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해. 넌 약간 멍청해 보이니까 ‘복종’의 사전적 의미를 손수 알려주지. ‘복종’이란 남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라서 하는 거야. 그러니 너도 무조건 내 말을 잘 따라야 해. 만약 안 그러면.”


“안 그러면?”  


 그의 눈에 순간 잔인하면서도 진지한 빛이 떠오르더니 손으로 그의 목을 댕강 자르는 시늉을 냈다. 이건 거의 협박이었다. 생전 처음 협박을 받은 그녀의 몸이 잔뜩 움츠려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은 도자기처럼 창백해져 갔다.      


 다행히 그때, 그들이 주문한 특별 메뉴가 쟁반에 받쳐져 나왔다.


 그가 주문한 ‘레드점핑초코의 저녁식사’는 한마디로 큼지막한 아이스크림 집이었다. 비스킷을 아래에 깔고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두껍게 바른 후 그 위에 오레오 쿠키를 한 층 쌓고 그 위에 체리 아이스크림을 얹은 후 제일 위는 치즈케이크와 아몬드, 퍼지가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지붕을 얹었다. 지붕 위로는 하얀 휘핑크림이 눈처럼 쌓여있고 굴뚝에는 빨간 체리가 얹어졌다. 도대체 한 사람이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아줌마 옆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게걸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수진 앞에 놓인 ‘레드점핑초코의 아침식사’는 그의 것보다 훨씬 가벼운 편이었다. 바닐라와 체리 맛을 섞은 아이스크림이 깔리고 그 위에 바나나와 다양한 종류의 시리얼과 딸기 조각들이 얹어있었다. 한입 떠서 먹어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 먹다가 맞은편의, 돼지같이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의 모습에 바로 스푼을 내려놓고 문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외할머니를 봐서 꾹 참았다. 할머니가 늘 말하는 바람대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하니까.


 드디어 그들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접시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에 떨어진 흔적들이 아이스크림의 처절한 운명을 보여줄 뿐이었다.

 

 문을 나서며 맞은편 길가에 위치한 교회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자 수진은 제발 그와 엮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고 또 기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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