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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Oct 16. 2015

2. 이안 일룸니아

2. 이안 일룸니아  


 롤리타임즈 11월 1일 자 신문에 한 기사가 올라오자 마을은 한동안 술렁거렸다.       



 미스터리한 사건 : 하얀 수사슴이 롤리마을에 나타나다.    


 10월 31일 저녁 10시쯤, 롤리마을 중심가에 하얀 수사슴이 나타났다. 사슴의 크기는 거의 경주마만 했으며 차로를 건너는 것을 여럿 사람이 목격하였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그 시각 지나가는 차가 없어 불의의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목격자에 따르면 사슴은 주택가를 향해 뛰어가다가 보안관의 저지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고 교회 묘지를 통과해 롤리숲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사슴은 마취 총에 맞았으며 마취약은 약 8시간 정도 갈 것으로 추정했다. 보안관과 급히 출동한 희귀동물 보호협회 직원들이 현재 숲을 뒤지고 있지만 아직 발견했다는 소식은 들어오고 있지 않다.

 특히 이 사슴은 커다란 흰 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협회 직원들이 사활을 걸고 그것의 포획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하게 여겨지는 하얀 수사슴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마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롤리마을은 11월이 되면 각자 집주인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지곤 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집을 꼽으라면 십중팔구 아이스크림을 파는 박지원의 집이 뽑힐 것이다. 매년 그는 사람들이 자고 있는 어느 날 밤에 그 특별한 장식을 다 마치고 다음날 아침 밖으로 나온 이웃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집이 제일 먼저 크리스마스 장식을 마쳤다. 마치 수많은 별을 위에서 쏟아부은 것처럼 갈색 기와지붕과 벽면이 온통 파란 별등으로 뒤덮였다. 그런데 그 불빛이 다른 집들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면서 은은했다. 이웃들은 볼 때마다 감탄하여 도대체 어느 가게에서 샀냐고 묻곤 했는데, 지원은 그저 고향에서 가지고 왔다고만 말할 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파란 별들이 꽂힌 지붕 위에는 요정 인형들이 한 줄로 쭉 앉아있었다. 초록색 빵모자를 쓰고 초록색 외투와 바지를 세트로 맞춰 입은 요정들은 심지어 초록색 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곳 아이들은 이것들이 밤이 되면 되살아나 움직인다고 굳게 믿었는데, 왜냐하면 지붕 위에 앉아있는 인형의 개수가 매일 틀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15개가 있고, 다음날은 16개, 그 다음날은 14개, 가장 적을 때는 12개에서 많을 때는 16개까지 앉아있었다. 


 어른들도 처음에는 재미로 인형 수를 셌지만 매일 틀리자, 어느 순간부터 머리 아프게 세기를 포기하고 그냥 “보기 좋구나.” 말하며 지나쳐버렸다. 먹고살기 위해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이런 사소한 데까지 신경 쓰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아이들의 믿음에는 절대 동조하지 않았다. 그저 강한 바람에 밑으로 떨어지거나, 아님 지원이 매일 밤 지붕 위로 올라가 인형을 뺏다 놓았다를 반복할 뿐이라고 여겼다. 

 이점에 대해 아무리 물어봐도 지원은 잔잔한 미소만 지을 뿐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의 집이 먼저 선보이고 나면, 이웃들도 드디어 장식할 때가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창고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장식품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집 외관과 나무들을 정성껏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크리스마스가 가장 큰 명절이기에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최대한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을 했다. 


 말자 여사는 이웃만큼 대단하진 않았지만 수진과 함께 나름 열심히 집을 꾸몄다.      




 문에 달린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 장식 액자가 살며시 떨리었다. 곧바로 수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녀의 품에는 빈 그릇이 하나 들려있었다. 순자 아주머니에게서 계핏가루를 좀 얻어오라는 할머니의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서운 바람을 헤치며 인도를 따라 뛰어갔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무척이나 추운 밤이었다. 

 

 코너를 돌아 아주머니네 골목에 들어선 그녀는 짙게 깔린 어둠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로수를 칭칭 감은 꼬마전등이 여기서만 모두 꺼져 있고 가로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 지붕을 덮은 전등도 하나같이 다 꺼져있었다. 전기가 나갔나 싶었지만 집안에서는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날카로운 칼날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힘껏 뛰어갔다. 아주머니는 혼자 거실 트리를 장식하는 중이었고 상민은 다행히 집에 없었다. 


 가루를 얻어가지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깜깜해서 인도가 제대로 보이지 않자 막 짜증이 몰려왔다.


“아니 왜 불을 안 켜놓은 거야!” 


“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지며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방이 환해졌다. 마치 전등끼리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방금 전까지 어둠에 둘렀던 곳이 대낮처럼 변하자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장관에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아마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 바로 이런 분위기이리라. 


 감탄이 깃든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방금 이 기적을 목격한 게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앞에서 한 소년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 더 얹은 키에 어두운 갈색머리를 가진 소년의 피부는 너무나 하얘서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고, 외투 없이 파란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반짝이는 트리 전등 아래에서 그렇게 몇 초간 서로를 관찰하였다.      

 

 잠시 후, 그가 그녀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몬드형의 눈과 우아하게 끝이 올라간 코, 귀족적으로 잘생긴 그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잘생겼데. 피부는 꼭 대리석 조각 같잖아.’


 그녀의 얼굴이 금세 발그스름해졌다.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온몸에 남아있는 용기를 다 짜내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마 그녀의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의 차가운 파란색 눈동자가 그녀를 무섭게 째리며 그냥 휙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얼굴이 사과보다도 더 새빨개졌다. 어이가 없었다. 그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마치 자신이 욕이나 한 것처럼 심하게 인상을 쓰고 가버리다니. 


 싸늘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과 몸에 부딪쳐왔지만 조금도 춥지 않았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집에 도착해 문을 세게 쾅 닫았다. 문에 걸린 동방박사 장식이 왼쪽으로 툭 기울어졌다.     


 소년은 산책을 마치고 파란 별등이 뿌려진 기와집의 열려있는 이층 창문으로 가볍게 점프해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 아까 골목에서 만났던 소녀가 문득 떠올랐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 되어가지만 주문을 외는 마녀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도대체 어떤 주문이지?" 


 여느 때처럼 몸 뒤척이기를 수십 번 정도 한 후에야 그는 겨우 잠들었다.     


 그 시각 기와집과 마주한 버려진 건물의 뒤편이었다. 벽 옆으로 살짝 내밀어진 허연 것이 소년이 막 들어간 창문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치자 그것의 형체는 점차 뚜렷해졌다. 흰 뿔이 달린 하얀 수사슴이었다. 사슴의 두 눈이 촉촉해지더니 곧 보석 알맹이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러내렸다.    



 

 며칠 후 수진은 과자 한 봉지를 사서 집으로 향하였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주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니 마음이 한층 즐거워졌다. 그런데 조용하던 동네가 갑자기 요란한 경적소리와 소란에 휩싸였다. 오르막 경사가 있는 차로 끝에서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그녀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골목대장 이상민이 제일 앞에서 달렸는데, 물론 그들 중 가장 크게 웃고 떠드는 이 역시 그였다. 수진은 그가 자기를 못 보고 지나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걸었다. 다행히 자전거들이 그녀 옆을 쓱 지나쳐버렸다. 안심이 된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뒤에서 자전거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전거 페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자전거가 옆으로 픽 쓰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통통한 몸집의 상민이 달려와 그녀 앞을 딱 가로막았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불곰 같았다.


“어이, 수박이라고 했던가? 대장이 지나가는데 감히 인사도 안 해?”


 질겅질겅 풍선껌을 씹으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그가 그새 그녀의 이름을 까먹은 것이다. 그의 부하들이 자전거에서 내려 곰처럼 느릿느릿 다가와 그녀를 빙 둘러싸고는 불량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에게 항상 눈 흘기며 다니던 계집애군. 안 그래도 얘 볼 때마다 비위가 상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대장 눈에 잘못 걸려들었네. 아이 고소해라.” 


 상민 옆에서 꾀죄죄한 소년이 새끼손가락으로 코딱지를 파내 점퍼 안의 티셔츠에 쓱 닦으며 말했다. 거의 완두콩만 한 그것 옆으로 온갖 크기의 코딱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가 대장에게 웃어 보였다. 상민은 더럽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앞에서 코 파지 말라고 그랬지? 얘는 수박이라고 말자 할머니 손녀래.”


“내 이름은 수박이 아니고 수진이거든.”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곰 무리는 까르르 웃었다. 그들 입에서 희한하게 하이에나 짖는 소리가 났다. 두 볼에 주근깨가 가득 난 소년이 휘파람을 불더니 동정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옆 아이에게 수군거렸다.


“쟤가 지금 상대하는 대장을 잘 모르는군.”


“쟤 오늘 큰일 났다. 대장한테 말대답까지 했으니.”


 상민이 웃음을 딱 멈추고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어른처럼 가래침을 옆으로 퉷 뱉은 후,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채 그녀에게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게 감히 어디서 말대답이야? 내가 수박이라고 하면 너는 영원히 수박인 거야. 전에 분명히 말했지? 이곳 대장은 나라고. 보기보다 머리가 영 돌덩어리인가 봐?”


“그럼 내가 너를 상민이 아니고 상놈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니?”


 대답해놓고도 저 스스로 깜짝 놀란 그녀였다. 평소 아이들과 눈도 잘 맞추지 못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주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녀는 불쑥 말이 튀어나온 자신의 입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곰들의 표정이 순간 비웃음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오늘 정말 무슨 큰일이 벌어지겠네 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상민의 얼굴에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부하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러나 매일 쫓아다니는 저들 역시 대장의 웃음소리가 어색하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웃음을 멈춘 그가 잔인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며 마지막 엄포를 놓았다. 


“이 계집애가 오늘 제정신이 아니군.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원래는 인사 안 한 벌로 과자만 받으려 했는데, 그것으로는 안 되겠어. 벌금 만원을 추가해야겠다. 이곳에서는 법을 어기면 벌금을 내야 하거든.”


“법이라니?”


“너 진짜로 머리가 나쁘구나. 내가 이곳에서 곧 법이야. 

 첫째, 넌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 법을 어긴 거고, 

 둘째, 넌 부하들 앞에서 나에게 공개적인 모욕을 주었어. 이것 역시 법을 어긴 거야. 알아들어? 

 첫 번째 법을 어긴 벌금은 과자로 하고, 두 번째 법을 어긴 벌금은 만원이야. 얘들아, 뭐해? 어서 빼앗지 않고!” 


 티셔츠에 코딱지를 주렁주렁 단 소년이 그녀의 손에서 봉지를 잽싸게 낚아채어 갔다. 그가 선보인 기술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거의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

 

 속수무책으로 빼앗긴 그녀가 봉지를 들고 있는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더니 맞은편의 다른 소년에게 던졌다. 그녀가 그리로 달려가자 그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른 이에게 그것을 던져버렸다. 


 울음을 참으며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상민은 마치 서커스단 동물의 재롱을 감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대장에게 까불면 그렇게 되는 거야. 어디 감히 까불고 있어.”


 도저히 그들과 힘으로 상대가 안 되자 그녀는 과자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돈 만원은 절대로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만큼의 돈이 지금 수중에 없기도 하거니와 구두쇠 할머니에게서 어렵게 타내야만 하는 피 같은 돈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저 코너만 돌면 바로 집이었다. 


 순간 꾀가 떠오른 그녀가 불쑥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집과 반대 방향 쪽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앗, 저기 분홍 코끼리!”


“어디? 어디 말이야?”


 상민과 부하들은 깜짝 놀라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열심히 코끼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사이 그녀는 쏜살같이 무리에서 벗어나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안 그들이 자전거에 올라타 그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느 정도 거리가 나던 것이 점차 빠르게 좁혀 들어갔다. 그녀가 아무리 달리기를 잘해도 자전거를 따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민이 퍼붓는 욕이 아주 잘 들릴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감히 나를 속여? 넌 오늘 죽었어!”


‘이러다간 잡히고 말 거야.’


 다급한 그녀의 눈에 마침 오르막길을 내려오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럴 수가, 그는 얼마 전에 그녀의 크리스마스 인사를 깡그리 무시한 그 잘생긴 소년이었다. 하필 이럴 때 다시 만나다니. 그러나 지금은 앞뒤 잴 형편이 아니기에 그녀는 무턱대고 달려가 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소년이 그녀에게 몸을 돌리려는 찰나, 얼굴과 목이 소방차처럼 새빨개진 상민이 자전거를 던져놓고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그는 자기 앞을 가로막은 소년에게 격분하여 아우성쳤다.


“너는 누구야? 좋은 말할 때 비켜! 난 네 뒤에 있는 애랑 볼일이 있으니까.”


“이놈아~ 대장 말 안 들려? 빨리 비키라니까! 빨리 비켜!”


 소년이 꿈쩍도 하지 않자 부하들은 하이에나 목소리로 떼창했다. 그들이 꼭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 떼 같다는 생각에 그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머금었다.


“어라, 웃어, 너 지금 웃는 거야? 얘 머리 돈 것 아냐? 감히 누구 앞에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민이 말을 끝내자마자 자신의 주특기인 오른쪽 주먹 펀치를 한 방 날렸다. 그런데 그가 쓱 피해버렸다. 움찔한 상민이 다시 한번 세게 펀치를 날렸다. 소년은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주먹을 단번에 부여잡더니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아아~”


 상민이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손목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자, 주위에 모여 있던 부하들이 “와아~”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시 일어선 상민의 두 눈은 분노로 일그러져 펄펄 끓기 일보직전이었고 볼을 마구 실룩거렸다. 순간 비열한 표정으로 변한 그가 곰처럼 두 팔을 앞으로 내밀어 온몸으로 소년을 덮쳤다. 그러자 그는 바람처럼 옆으로 피하더니 자기 앞으로 다가온 상민의 엉덩이를 오른발로 살짝 밀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분명 살짝만 밀었는데 그가 저 앞으로 붕 날아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몇 초 후, 상민이 얼굴을 들자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피를 훔치며 일어선 그가 부하들에게 최후 공격을 지시했다. 


“저놈 죽여 버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단 오 분 만에 모두를 길바닥으로 내던졌다. 피가 나고 멍이 든 부하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급히 도망쳤다. 얼굴이 피로 범벅된 상민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자전거로 다가가더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소년과 수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전거를 타고 서둘러 사라졌다.     



 주위가 예전처럼 평온함을 되찾았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수진이 그의 등에다 대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난 황수진이야. 너는?”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일이 다시 떠오른 그녀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부르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사람이 어쩜 그리 못됐니?”

 

 그가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녀는 조금 전 상민과 그 무리를 단숨에 해치우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덜컥 겁이 난 그녀가 먼저 사과를 하려는데 그가 재빨리 뒤돌아봤다. 그리고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이안 일룸니아야. 그리고 이거.” 


 약간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는 매우 근사했다. 그가 바닥에서 과자봉지를 집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을 때, 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 듯했다. 


“끼이익~”


 유난스럽게 시끄러운 자동차 급정거 소음에 그녀의 시선이 차도로 돌려졌다. 별일 아니었다. 재빨리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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