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이 Dec 31. 2020

2020년을 두 단어로 정의한다면

2020 연말정산

내게 주어졌던 2020년을 대표할 두 단어를 꼽으라면 '거품'과 '발견'을 택하겠다. 올해는 나를 둘러싼 많은 곳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해였다. 대표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있다. 몇 달 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느샌가 불어나 버린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정리한 적이 있다. 정말 자주 연락하는 사람과 소중한 인연들을 제외하곤 모두 숨김 처리했는데, 목록에 남은 사람들이 3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숨김 처리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니, 반갑게 인사하고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주야장천 주고받았던 사람들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려서, 친분을 유지하려면 서로 시간과 노력을 내어 안부를 묻고 만남을 성사시켜야 하는데, 상대는 내게 전혀 연락이 없고, 그렇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정도로 이 사람이 내게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대상들이었다. 좀 더 사적이고 내밀한 자리에서 만남을 가져야 하는 이 시국에, 서로가 서로에게 '그 정도' 수준은 아닌 사람. 인간관계에 가득 끼어 있던 거품이 가라앉으며 '진짜 관계'가 드러난 것이 아닐까. 코로나19로부터 서로를 지키기 위해 만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게 아니라, 코로나19 덕분에 만날 필요가 없어진 관계가 가득했단 사실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거품이 걷히면서 드러난 관계의 민낯에 무척 아파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사라질 거품이었다면, 차라리 지금 가라앉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약간의 거품은 즐거움을 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앞으로도 차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는 '발견'도 가득했던 해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여러 상황으로 인해 직접 밥을 챙겨 먹고 해 먹을 줄 알아야 했다. '넌 참 야무져, 어떻게 그렇게 잘해 먹고 지내?'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난 그렇게 살아야 했어서 그 습관이 몸에 밴 것뿐이다. 챙겨 줄 사람이 없어서 못 먹고 지낸다거나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먹고 싶은데 먹지 못했다는 말 만큼 한심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집에서 홈베이킹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하던데, 나는 내게도 빵을 굽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잠깐의 흥미로 지나가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구워댈 줄은 더더욱 몰랐다. 멋스럽고 예쁜 요리보다는 생존형 요리를 해 왔던 내가 그럴듯하게 빵을 구워내고 그럴듯하게 플레이팅도 할 줄은. 게다가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평소 운동 신경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복싱장에서 하루에 3시간은 거뜬히 보낼 수 있다는 사실도, 솜주먹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주먹의 힘을 기르고 싶어질 줄도 몰랐다. 아, 글쓰기와 작가가 되는 것, 출판하는 일에 욕심이 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새해 목표였던 독립 출판을 실천에 옮기지 못해 원통할 정도로 속이 쓰리고, 출판사 제안으로 원고를 쓰고 있다는 지인들의 SNS를 보면 부러움에 뒤집어질 정도로 배 아파할 줄은 몰랐다. 앞서 관계에 아파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외로움도 무척 잘 타는 아이였다. 직접 만날 수 없고 이야기할 수 없음에 마음은 답답하고 홀로 고독해져서 쓰리고 아픈 속을 울음으로 삼킨 날도 많다.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니. 내 안에는 내가 참으로 가득하더라.



더 나아가 일상의 사소한 행위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나는 어렵지 않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발견했다. 굽는 일에서, 땀을 흘리는 일에서, 그리고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에서 기뻐하고 뿌듯해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앞으로 내가 집중해야 할 일과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창작의 감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존재다.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열심과 노력일지 몰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나를 나답게 그려가는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이 열망은 새해를 넘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조금 더 선명해진 나만의 색채로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아름답게 꾸며 가리라 다짐하면서,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몇 시간 남지 않은 12월 31일을 만끽하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이 기분 좋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