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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Dec 28. 2020

연말이 기분 좋은 이유

모두의 힘찬 2021년을 위하여

크리스마스가 지나야 비로소 한 해의 끝이 바짝 다가왔음을 느낀다. 여기엔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도 한몫한다. 각종 대형 마트부터 패션 및 잡화 브랜드가 원하지 않아도 12월 25일까지는 할 일을 쥐여 주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라며 대폭 할인을 하고 홈 파티를 즐겨 보라며 고기와 와인은 물론 화려한 즉석요리까지 선보이니, 선물을 고르고 기분을 낼 만한 음식을 사다 두어야 하기에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다. 케이크 주문은 또 어떤가.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입조차 어려운 게 요즘 트렌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당일, 최고조에 이르렀던 휴일 분위기를 만끽한 뒤 주어진 사회 과제를 다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살짝 긴장을 놓으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아, 며칠 뒤면 새해구나 라는.


그렇게 갑자기 울적해진다. 무사히 한 해를 더 살 수 있겠구나 라는 안도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고 막막함만 가득하다. 허무함이나 아쉬움이 만연한 시기지만, 개인적으로 이맘때가 되면 오히려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여기서 긍정이란, '억지로 기뻐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해의 끝이 임박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이유 모를 허탈감이나 미래를 향한 불안감은 어느 정도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덜 우울해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늦여름부터 늦가을 사이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으로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러다 12월이 시작되는 순간 속상한 마음을 조금씩 털어내기 시작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곧 떠나갈 시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해 준비 모드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 정리를 하고, 새해 소망을 적어 보고, 내년 달력을 넘기며 중요한 날에 스티커를 붙인다. 또 몇 장 남지 않은 올해의 다이어리에 지금의 기분을 기록하며 잠시나마 여행자의 마음을 느낀다. 우리는 곧 작년이 될 올해를 떠나 새해라는 목적지에 갈 시간 여행자들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각자의 여행 가방을 들고 공항 대합실 의자에 앉아 푸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활주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랄까.


© anniespratt, 출처 Unsplash


출발이란 단어가 주는 힘찬 기운을 좋아한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마지막을 정리하고 다가올 시작을 고민하게 되기에, 연말을 좋아한다. 반성과 후회, 기대, 설렘, 약간의 고양감이 한데 어우러져 알 수 없는 특유의 기분을 만들어 내기에, 좋아한다. 자신감이 가득하다가도 의심이 들고, 다시금 확신에 찼다가도 일순간 기대감이 사라져 버리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시작을 앞둔 이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시작을 고민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빠질 일도 없다. 더불어 시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시작을 결심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함이고, 이 결심에는 귀찮음을 털어낼 근성이, 불편함을 감내할 의지가, 두려움을 뛰어넘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말은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때다. 마치 시금치를 먹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군말 없이 시금치 얹은 한 입을 받아먹는 것처럼.


한 장씩 넘어가는 달력과 더없이 차가워지는 공기를 느끼며 자연스레 다음을 생각하게 되고, 그 정점인 12월 31일 11시 59분이 지나면 새롭고 즐거운 일이 가득할 것만 같은―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강렬한 기분에 휩싸인다. 갑자기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다이어트 계획을 세워도 유난스러워 보이지 않는 흥미로운 시기. 그렇기에 나는 ‘홀리데이 블루’를 느끼는 이에게 오로지 이맘때에만 실존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퐁당 빠져 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한다. 눈앞의 풍경은 황량할지라도, 연말은 두근거림을 만끽할 수 있는 썩 괜찮은 때다.


연말연시에 하는 소소한 의식을 만들어 보는 일도 즐겁다. 그 누구도 시작을 기념하는 즐거운 의식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다. 나는 매년 다이어리 맨 뒷장에 새해 소망과 목표를 적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이라던가 행복 같은 추상적 개념을 머릿속에만 저장하기보다 3kg 빼기라던가 책 쓰기 같은 구체적 목표를 보이는 곳에 써 두려 한다. 현실의 씁쓸한 맛에 익숙해질수록 '인생 참 재미없고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 없어서 그냥 아프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면 됐지' 라고 생각하기가 쉬워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마음가짐이 나와 잘 맞지 않는데,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맞지 않았으면 하는 지극히 사적인 바람이 있다. 모양은 달라도 각자만의 나침반이 마음속에 존재했으면 한다. 원대한 목표와 계획이 아니어도 좋다. '계획'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단 걸 제대로 배운 한 해였으나 이 단어가 주는 희망까지 외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몸속도 비워야 한다며 약국에서 세 식구가 회충약을 먹는 이상한 연말 전통도 내가 만들어 냈는데 최근 몇 년간 지키지 못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꼭 약국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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