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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Dec 10. 2020

말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편지도 부칠 수 없다니


우체국에 편지 여섯 통을 들고 갔다가 두 통을 부치지 못한 채 집으로 왔다. 며칠을 걸려 완성한 연말연시 카드였는데 말이다. 깜짝 편지에 놀랄 친구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들뜬 마음으로 나갔다가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진 마음을 붙잡고 돌아왔다.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마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니. 정확히는, 일본은 두 달이 걸릴 수도 있는 배편으로만, 미국은 통상 우편 서비스가 전면 중지되어서 항공 특급 우편으로만 보낼 수 있다고 우체국 직원은 말했다. 주소를 꾹꾹 눌러 적은 편지 봉투와 손에 든 만 원 한 장이 무척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 편지는 내가 친구에게 보내는, 남은 2020년을 응원하는 메시지였다.


‘말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고, 지난 일요일에 줌 앱으로 진행한 티타임에서 어느 일본 분이 말했다. 당시 통역을 하느라 무척 정신이 없고 분주한 상태였기에 그분이 사용한 정확한 표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나는 부족하지만 봉사 차원에서 한-일 통역 담당자로 온라인 티타임에 참석했다). ‘말도 안 된다’고 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했는지, ‘터무니 없다’고 했는지. 아무튼 이런 뉘앙스의 표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분은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고 했다.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닌데도 뇌리에 꽂혀 며칠 동안이나 잊히지 않았던 말인데, 우체국에 갔다가 이 표현을 물리적으로 체험하고 나서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시대다. 계획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무력한 적이 있었던가. 할 수 있는 건 부치지 못한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것뿐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특급 서비스로 보낼 수야 있지만, 내가 쓴 편지가 이렇게까지 전해야 할 대단한 물건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발길을 돌렸다. 뭐라고 쓸지, 어디에 적을지, 함께 뭘 동봉해서 보낼지 고민하던 작은 정성이 순진하고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손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약 3주 전에 번역했던 어느 칼럼 때문이었다. 2020년을 돌아보며 연말 계획을 밝힌 어느 인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쓸 거라면서, 엽서에 시 한 편을 적어 보내거나 키스 자국을 만드는 등, 구시대적이고 향수 가득한 행위로 힘들어하는 주변인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재미있는 계획이어서 나도 따라 해보고 싶어 졌다. SNS에 ‘작고 얇은 무언가’를 보내 주고 싶으니 원하는 사람은 집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고 국외 포함 총 6명에게 집 주소를 받았는데, 예상보다 답장한 사람 수가 적어서 아쉬웠으나 손으로 한 장 한 장 편지를 쓰던 중엔 무척 다행이라고 여겼다(오랜만에 중지 손가락에 볼펜 자국이 났다). 안부 인사를 담은 엽서와 겨울에 어울리는 그림 한 장, 홈베이킹에 빠져 있는 내게 당당히 빵을 요청할 수 있는 시식권, 글귀가 적힌 스티커까지. 우울한 시기에 조금이라도 기분을 좋게 해 줄 만한 요소를 끌어 모아 봉투에 넣었다. 언제 도착하려나. 우체통에서 편지를 발견할 땐 무슨 얼굴을 할까? 조금이라도 기뻐해 준다면 좋을 텐데. 내가 보내려던 편지에는 이런 기대와 설렘, 그리고 나름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두 명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했지만.


일단 각각 일본과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SNS 메시지로 사정을 설명했다. 허무한 마음이 조금 잦아들면 내용물도 꺼내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보내 줄 예정이다. 이 기분을 허무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 자체가 좋은 활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편지지를 고르고, 봉투를 고르고, 시식권을 제작하는 등 바쁘디 바쁜 현대 사회를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내가 즐겨하고 좋아하던 일을 되찾은 것 같아 기뻤는데 강제로 마무리를 해야 했으니 보잘것없는 일이 된 것 같았다. 보내야 완성인데, 보내지 못했으니 미완성으로 그쳐 버렸으니까. 어쩌면 누군가에게 작은 정성을 보내려던 일은 그들보다 나에게 소소한 기쁨을 부여하는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떤 것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쌉쌀한 커피 한 모금으로 여유를 찾고 다시 '너와 나'를 위한 작은 기쁨 프로젝트를 찾아 시작하려 한다. 어릴 적 즐겨 부르던 <창밖을 보라>에는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마음껏 즐기자 맑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기 전에'라는 가사가 있다. 전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나 우울감과 위화감으로만 매일을 지낼 순 없기에,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연말이지만 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즐기고자 한다. 분명 모두의 곁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 지금을 잘 견디었으면 좋겠다. 차가운 공기도, 흐린 하늘도, 답답한 마스크도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걷히리라. 우리의 마음과 일상은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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