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와 볼프강 틸만스의 작품이 있는 곳
언제부터인가 해외여행을 가면 그곳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러보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해당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우리나라에서는 열리지 않는 유명 작가의 특별 전시회를 만나는 우연도 반갑기 때문이다. 예술사에 해박하지 않으니 그런 곳은 안 보아도 그만이라는 태도는 12년 전 미국 게티 빌라를 방문한 이후로 버렸다. 나의 관점으로, 그림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즐겁게 그려내는 일이 미술을 감상하는 가장 올바른 자세란 걸 깨달았다. 번역가로 살고자 한다면, 나아가 작가로 살고자 한다면 예술은 일을 위해서도 영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여행을 함께하는 엄마도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어떤 곳이 있을까 검색을 하다가 '온타리오 미술관(Art Gallery of Ontario)'을 알게 됐다. 토론토 시내에는 두 곳의 미술 갤러리가 있는데 하나는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이고, 나머지 한 곳이 이 온타리오 미술관이다. 종종 주민들도 헷갈려한다. 명백하게 다른 곳이니 가려는 장소의 위치와 이름을 잘 확인하고 표를 예매해야 한다.
미술관의 내부 인테리어와 건축 구조도 볼 만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계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려한 느낌이 드는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더불어 다른 갤러리에 뒤지지 않기 위해 엄청난 기싸움을 할 테지. 저녁 6시의 온타리오 미술관은 천장에 있는 채광창을 통해 저녁 노을빛을 멋지게 담아내고 있었다. 곡선의 미가 잘 살아 있는 계단도 아름다웠다.
마침내 모네의 그림을 찾아 마주했다. '수련'처럼 잘 알려진 제목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 풍경화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행을 오기 직전에 마감했던 출판번역 원고가 떠올랐다. 원고 속에서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간 작가는 모네가 그린 <수련> 연작을 보면서 감탄을 한다. 그리고 그가 액자가 닿는 선의 가장자리까지 붓칠을 했다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듯한 끝자리까지 채색을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지저분한 잉크 자국들로 보일 뿐이지만 모네는 잉크 자국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았고, 그렸고, 계획했을 것이다.
토론토 시내 어딘가에서 모네의 또 다른 그림을 보며 작가가 말한 문장을 기념하고 있는 이 순간들이 마음에 들었다.
몇 점의 그림을 더 보고, 미로 같은 전시실을 지나 더 볼 것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미술관 지도에 볼프강 틸만스의 To Look Without Fear 사진전이 진행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잠깐, 내가 인터뷰 기사를 번역했던 유명 사진작가의 전시회가 지금 여기서 열리고 있다고? 뉴욕에서 열렸다는 그 회고전? 그걸 오늘 지금 볼 수 있다고?
무료 관람자도 볼 수 있는 건지 궁금해 직원에게 물어보니 관람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해주었다. 함께 관람을 간 엄마는 잠시 쉬면서 나를 기다려 주기로 하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5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맙소사. 분홍색 티셔츠에 아디다스 팬츠를 입고 모래 위를 걷는 작가의 모습이 대문짝만 하게 프린트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내적 비명을 질렀다. '번역 원고에서 봤던 사진이잖아! 대박!'
여기저기에서 PDF로만 봤던 사진들이 나를 반겼다. 뒤집어서, PDF로 이미 본 사진들인데도 전시회장을 통해 보는 기분이 남달랐다. 각기 다른 크기로 제작된 사진들이 주는 압도감과 분위기가 자연스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사진 옆에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무척 신기했다. 보통은 작품 제목과 연도, 무엇으로 찍었는지 등을 간단히 기입해 두는데 흰 벽에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전시용 팸플릿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 눈에 띄었다. 나도 가져와 안을 펼쳐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팸플릿에만 작품 정보를 기입해 둔 것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상당히 불친절한 전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관객의 능동적 관람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 내 시선을 잡아끈 작품의 위치를 찾고, 그것의 번호를 확인한 다음, 제목을 확인하니 더욱 기억하고 싶었고, 오래 보고 싶었고, 또 진한 여운이 남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팸플릿을 집에 가져왔다 하더라도 사진이 붙어 있던 전시실 전체의 사진이 없으면 다시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해져 보자. 전시회에 가서 신나게 작품 사진을 찍어 두고 다시 꺼내 감상한 일이 몇 번이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런 경험이 주는 기발하고 강렬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맨 아래 왼쪽 독일어로 적힌 작품이었다. 팸플릿에 적힌 작품 설명을 보고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서 여운을 즐겼다. 이 작품의 제목은 Wer Liebe wagt lebt morgen으로, 의미는 Who Dares to Love Lives Another Day(번역: 사랑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라고 한다.
꽤 많은 사진들이 공간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좁은 벽부터 창문 바로 옆까지 다양한 공간을 활용한 것이 멋있었다. 어떤 사진을 작고 크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꽤 깊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사진집을 제작해 본 적이 있는데, 어떤 사진을 어디에 놓을지 고민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때때로 무심하게 툭 놓은 사진이 최고의 배치(placement)가 되기도 해서 사진을 배열하는 일에도 완급 조절이 필요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작가와 큐레이터는 어떤 협의를 통해 사진들을 이 공간에 담기로 결정했을지 궁금해졌다.
느긋이 전시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관람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천천히, 최대한 많은 작품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조금은 바쁜 마음으로 작품들을 둘러볼 수 밖에 없었는데(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쉽지만 힘내어 이곳까지 한 번 더 발걸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토론토에 찾아온 33도의 무더위와 시차 적응,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으로 나 또한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과 감동을 지나치지 않은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기로 했다.
전시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친구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내리기 직전, "이 아름다운 사진들을 모두 즐겨줄 거야(I am so ready to see all these beautiful pictures)"라고 말했다. 그 속삭임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즐기는 작가가 완성한 사진을,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즐기러 오는 관람자의 관계가 퍽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은, 이 행위를 누군가의 것을 보러 가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눈앞의 작품을 나의 관점으로 누리는 능동적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말이었다. 나의 글도, 사진도, 책도 언젠가의 누군가에게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틸만스의 작품 중 유명한 사진을 꼽으라면 바로 이 사진, 샤워를 마친 가수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의 초상화다. 이 사진은 프랭크 오션의 앨범 커버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1층에 있는 미술관 기념품점에서 뭔가 살 게 있을까 둘러보는데 이 사진이 딱 1장 남아 있어서 무척 고민하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대단한 팬도 아니니 정말 가지고 싶은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대신 미술관 밖 기둥에 걸린 현수막 사진을 찍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 후기를 쓰고 드는 생각. 이 글들과 사진이 전자책으로 발행된다면 어떨까?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 중인 캐나다 토론토 여행기의 일부를 작가가 편집한 것으로,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kk646/223136532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