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빗질 소리에 눈을 뜬다.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하늘. 이불을 갠 후 공원에서 두 손 모아 가져온 작은 싹에 분무기를 조심조심 뿌린다. 마치 목마르다고 보채는 아기를 달래는 양. 작업복을 입고 수건 하나를 두른 채 문을 나서는 장년의 남성.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빼들고 청소차에 몸을 싣는다. 등 뒤에 '도쿄 화장실(The Tokyo Toilet)'이라는 마크가 선명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똑같다. 거리에 있는 화장실. 밤에는 유일한 취미 생활인 독서를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일상 속을 달린다. 독일 출신의 빔 벤더스 감독이 찍은 일본 영화 '페펙트 데이즈'는 아주 단순하다.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는 모습이 전부다. 가끔 같이 일하던 청년 미화원이 갑자기 그만두거나, 조카가 불쑥 찾아왔다거나 암에 걸린 남성을 만나 잠시 함께 있는 것이 변화라고 하면 변화일까. 평온하기 그지없는 삶.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웃으며 운전하는 마지막 신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상하다. 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영화를 보면서 자꾸 눈시울이 붉어진다. 결코 슬픈 영화가 아니다. 눈물샘을 자극할만한 요소는 영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꾸 눈에서 뭔가가 떨어질 듯하다. 늙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 삶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부터 반복하는 일상이 있다. 점심인지 요기인지 모를 식사를 하고 난 후 회사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쳇바퀴 같은 사무실을 벗어나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끼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종로, 인사동과 안국동에서 계동을 지나 중앙고를 찍고 가회동을 거쳐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약 1시간가량의 코스. 처음 시작할 때는 땅만 보고 걸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현실을 되짚어보듯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오르내리는 언덕, 울퉁불퉁한 보도, 시커먼 아스팔트와 수많은 인파. 내가 겪었던 그 시절을 닮았다. 걸어도 상쾌하지 않았다.
뭔지 모를 감상에 휩싸이게 한 영화에 마음을 뺏긴 후 시선이 달라졌다. 산책을 하며 주인공이 하던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평평하고 온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래서 위로 시선의 위치만 바꾸었을 뿐인데 땅에서는 못 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맑은 날에는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이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영하의 추위와 칼바람을 막겠다고 온몸을 꽁꽁 싸맨 옷들이 거추장스러워진다. 허물을 벗듯 외투를 벗어 든다. 날 것의 나를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거리에 세차게 바람이 불고 비가 뿌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늘은 먹구름만 머금고 있을 뿐이다. 땅을 바라보며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매년 찾는 제주도에서는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평온함을 맛본다. 아름다운 바다, 이국적인 풍광과 관광지 때문만은 아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하늘이다. 탁 트인 시야, 도시의 빌딩에 조각난 하늘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모습이다. 가슴이 터질 듯 풍만한 하늘에 그림을 물감도 있다. 나무다. 인간에 의해 어디선지 끌려온 도시의 나무들이 회색빛에 둘러싸이고 '가지치기'라는 명분으로 온몸이 조각조각 날 때 수 백 년 제주를 지켜온 터줏대감들은 회화를 그린다. 매년 찾아도 질리지 않는 제주의 매력이다.
서울의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빠르게 걷는 직장인,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재잘거리며 뛰어다니는 학생들,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 다닌 연인들, 빵을 사기 위해 길게 대기표를 들고 서 있는 고객들... 모두 제 할 일에 열중이다. 남이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만의 삶, 혼자만의 일상을 즐길 뿐이다. 그 속에 나 자신도 밀어 넣어 본다. 예전 같으면 튕겨져 나왔을 터지만 지금은 함께 묻어간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싶다.
모든 게 마냥 평온한 것은 아니다. 여느 날처럼 무념하게 길을 걷는데 뭔가 이상했다. 길거리에 온통 경찰버스 천지다. 서울에 있는 모든 경찰버스란 버스는 모두 모아 온 듯싶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련의 사태가 산책길의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달갑지 않다. 걷는 것이 방해받는다는 사실이. 평화로울 수 있는 내 일상을 침범당했다는 생각에, 굳이 많은 사람들과 몸을 부딪쳐야 하는 현실에 저 밑에 감춰져 있던 분노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나오려 한다. 악다구니 소리, 온몸을 칭칭 감은 구호들, 적대감 가득한 시설들... 나의 평온을 질식시키는 조름이 자꾸만 어제의 나를 끌어낸다. 나의 퍼펙트 데이는 아직 멀리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