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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연 Jun 06. 2024

'에코델타동(洞)'과 한국어순화운동

추상적 대의와 개인의 자유

최근 부산 강서구에서 전국 최초로 시도한 영문 법정동 명칭 ‘에코델타동(eco-delta洞)’ 추진계획은 불발로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한국땅의 법정 구역명을 외래어로 표기하는 것은 국어기본법과 국어진흥조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행안부는 불승인 이유를 설명한다. 근거규정인 국어기본법 제4조는 지방자치제의 우리말 사용 책무를 적시하고 있다. 지자체가 국민이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국어보존에 힘쓰도록 유도하는 것이 그 취지이다. 여기에 부산의 한 한글 관련 단체가 가세해 ‘전 세계가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려고 애쓰는 마당에 오히려 외국어를 남발하는 정책은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라며 해당 지명 설립에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요즘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한국어의 기괴함을 반추해 보면 행안부나 한글보호 단체의 반응에 공감이 간다. 재미를 위해 다소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직장인의 일상을 리얼하게 담아 세간에 인기가 높은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업무처리를 위한 의사소통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리뷰’ 등은 이미 한국어의 일부로 굳어진 지 오래이며, ‘위클리’(weekly; 주간미팅), ‘에이셉’(as soon as possible; 즉시), ‘빌드업’(build up; 초기 아이디어의 구체화), ‘러프하게’(roughly; 대략, 어림잡아) 등 ‘이걸 굳이 영어로 써야 하나’ 싶을 만큼 만연한 외래어 사용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음식점을 나설 때 점원에게서 계산서 대신 ‘빌지’(bill紙)를 받고 있다. 한글도, 한자도, 영어도 아닌 것이 참 기이하다. 하긴 ‘휴대폰’(携帶phone)도 쓰는 마당에 뭐 더 놀랄 것도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에코델타동’ 설립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에 우려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지역의 명칭을 정할 자유와 권리는 그 땅을 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주자에게 있다. 지난 3월 시작한 에코델타시티의 사업지가 서로 다른 행정구역을 아우르게 되자 주소와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새로운 법정동 명칭이 필요했던 것이고, ‘에코델타’는  환경과 생태계(eco), 그리고 낙동강 삼각주(delta)를 합성한 것이어서 명명(命名) 배경 역시 이해가 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청에서 기존 주민과 입주민, 그리고 입주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선호도 조사에서 해당 명칭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외래어의 유입을 걱정하는 정부나 시민단체의 입장은 대의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대의의 실질적 무게와 여파를 측정하기 어려운 만큼 금번 결정에 대한 그들의 책임소재 역시 실체화하기 어렵다. 득(得)이 되었든 실(失)이 되었든, 실질적 결과는 오로지 거기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삶의 터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 주민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세계적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여전히 독재자의 통치나 내란 등으로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고, 이것은 종종 식량부족 사태로 귀결되곤 한다. 국제구호단체들은 직접 식량을 공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주민 공동체 주변에 작물을 재배해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인 식량자원 수급을 꽤 하기도 한다. 이때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 저렴하면서도 농사에 열악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유전자변형(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농산물인데, 극렬 생태·환경주의자들은 이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인류를 위해 기어이 현장으로 몰려들어 재배지를 전소시키고 난 후에야 그들의 대의는 달성된다. 아사(餓死) 직전의 주민들은 멀리서 이를 멍하니 지켜보며 굵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최근에는 영국의 환경단체에서 탄소배출에 의한 지구의 기후온난화를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일반차량의 후면부에 드러눕거나 범퍼에 기대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이동을 막아섰고, 이러한 모습을 환경 캠페인에 활용한 적이 있다. 당장 생계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 영국시민들의 다양한 대응방법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는데,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역력하다.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대의’가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에 의해 길이 가로막힌 이들이 겪어야 했을 감정소모나 운송지연 등으로 발생했을 금전적 피해는 쉽게 따져볼 수 있을 터이다.



행안부와 한글단체의 대응에 우려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증적 근거가 희박한 언어 순혈(純血) 주의이다. ‘러프하게’ 얘기해, 순수 한글을 지키고 가능한 한 외래어를 한국어로 순화하여 표현함으로써 한국인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이어나가자는 취지일진대, 언어의 생태학상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한글의 퇴출을 야기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궁극적인 질문은 ‘어떤 언어가 더 멀리, 더 오래 전파되는가’하는 것이며, 이는 생물학적 진화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당 언어가 얼마나 빨리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 적응하며 꾸준히 진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현재의 영어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애초부터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의 수가 많기 때문일 수 도 있지만, 영어는 외래어를 날것 그대로 흡수하는 경향이 세다. 우리나라의 김치는  ‘kimchi’로, 중국의 두부는 ‘tofu’로, 일본의 만화와 가라오케는 각각 ‘manga’와 ‘karaoke’ 그대로 표기한다. 애니메이션(animation)은 본래 영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이를 ‘아니메(anime)’로 부르자 이 역시 그대로 차입하여 그 특수성을 잡아낸다. 외래어를 순화하거나 ‘영어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원래의 음가(音價)에 최대한 가깝게 발음되도록 알파벳 조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비영어권에서 온 이들과 통번역을 거치지 않고서도 소통할 수 있는 분야와 폭이 넓어지게 마련이며,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늘어난다.


한국어 순혈주의의 작동방식은 이와 반대 방향. 우리가 일상에서 쓸 수 있는 어휘 수는 감소하고 있다. 일제의 적폐청산을 이유로 우리는 ‘오뎅’과 ‘와사비’, ‘다마네기’와 ‘사시미’를 버렸다. 이제는 어묵과 고추냉이, 양파와 초밥이 더 자주 쓰이며, 때에 따라 강요되기도 한다. 필자가 일본어에 향수가 있어 이를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난 세대가 쓰던 단어들은 이유야 어떻든 거기에 그냥 두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새로 들어오는 외래어들도 그러라 하자. 누군가가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의도가 있을 것이며, 순한글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로 그에 대한 가치평가를 내려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는 그저 풍부한 어휘로 세밀한 뉘앙스가 전달되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쾌감과 희열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 다만 일본말 몇 개로라도 할아버지와 손녀딸이 소통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가정이 더 많기를 바란다. 세계인이 한국어로 대화할 때 서로 통하는 것이 더 많다고 느끼는 날이 오길 바란다. 현재의 방식으로 한국어 순화가 계속될수록 우리의 어휘는 점차 줄어든다. 세대 간 그리고 인종간 소통의 빈도와 밀도 역시 함께 사그라진다. 오뎅과 어묵은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니 사실 총어휘의 수는 같지 않냐는 어리석은 반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지난 세기를 살아낸 이들의 기억 속에 오뎅과 어묵은 엄연히 다른 경험과 정서를 불러오는 분리 가능한 단어들이다.


‘에코델타동’의 명칭 승인이 기각된 것을 안타까워하여 이를 ‘세모벌(세모꼴의 넓은 땅)’ 등 순우리말로 바꾸어 제시하는 한글 전문가도 눈에 띈다. 한글순화를 위한 그들의 노력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여 ‘세모벌’이 ‘에코델타’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플로베르(19세기 프랑스 작가)가 그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단 하나라, 의미의 변질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이를 다른 이름으로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의 입주민들이 ‘에코델타’라는 이름으로 의도하고 있는 이미지와 정체성을 ‘세모벌’이 충족시켜 줄 수 없다. 그들의 자산이고, 그들의 선택이며,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그들의 것이다. 한국어 순화라는 추상적 대의와 명분으로 그들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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