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커뮤니케이션: I. 사과하라

인류가 발견한 다섯 번째 사과

by 김상연

“흥분하지 마라. 그냥 말 전하러 온 거니까. 사과하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잘. 못. 했. 음. 이 네 마디야”. 영화 ‘달콤한 인생(김지운 감독 2005년작)’에서 조직의 한 하수인이 주인공(이병헌 배우)에게 던진 보스 백사장(황정민 배우)의 전언이다. 주인공이 백사장의 ‘가오’를 무너뜨리자 그에 분노해하면서도 나름 조용하고 깔끔하게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그. 냥. 가. 라.” 패기에 재치를 섞어 주인공이 답하자 하수인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난다. 이후 주인공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맞으며 결국 보스를 죽이고 나서야 악연은 끝이 난다.


잘못했음.png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utopos_finder/223594297948)

사과를 했다면 정말 주인공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더 흥미로운 질문은 ‘도대체 왜 보스는 굳이 사과를 받아내려 했을까’하는 것일 게다. 어차피 사과 따위 하지 않을 주인공이 화해의 제스처를 무시하도록 유도해 그를 제거할 명분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두목에게서 진심이 느껴진다. ‘잘못했음’이라는 말이 어이없으리만큼 쉬워 보이지만, 사과할 의향이 전혀 없는 상대방에게서 이 네 마디를 끌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죽여버리면 심플하게 모든 게 정리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둘에게는 죽음으로도 청산할 수 없는 일종의 채무관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십 대 소년들의 실없는 장난으로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 재판부의 너그러운 처분에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직접 이들을 심판하려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총이 들려져 있는 아버지의 손끝이 감정에 북받쳐 떨려온다. 그럼에도 방아쇠를 당기기 전 기어이 물어야 한다. ‘죽은 내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 사과를 듣는다 하더라도 죽은 딸아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사과는 뭘 위한 걸까.


체면(體面)때문이라 한다면 독자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체면이 자신의 코어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라면 누군가는 죽음을 불사할 수도 있다. 체면은 그것이 가지는 상호의존적 성격 때문에 맞장구 쳐주는 상대방 없이는 세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실수든 의도된 것이든, 누군가에 의해 당신의 체면이 허물어졌다면, 그것을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다. 한 사람 앞에서 잃은 체면을 다른 사람과의 대화로 되찾을 수 없다. 백사장에게는 보스로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주인공의 사과만이 자신의 원래 이미지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주인공이 이를 거부하면서 악당인 백사장이지만 꽤나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체면 살려주기’에 익숙하다. 겉으로는 별 의미 없는 대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대화에 임하는 두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체성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동시에, 상대방이 지향하는 페르소나를 재빠르게 파악해 다음 대사에 녹여낸다. 일상에서 우리의 대화는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서로가 원하는 면(面)을 지켜주기 위한 말하기와 눈치보기가 춤추듯 우아하게 이루어진다.


식사 후 상대방의 치아 사이에 끼어있는 고춧가루를 우리는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그/녀가 최소 테이블 매너는 지킬 줄 아는 교양인의 이미지를 원할 거라는 나름의 추측과 공감에 기반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기어이 마주 앉은 친구에게 무안을 주고 파안대소를 해야 끝이 난다. 여기서 이 녀석이 원하는 것은 교양인의 모습이 아니라 당신과의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와의 회식자리에서 만들어진 친근한 분위기에 온갖 불만을 토로하던 부하직원. 다음날 아침 쭈뼛거리며 상사를 찾아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혹시 실수한 것은 없는지,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 말한다. 상사는 ‘나도 어제 꽤 취해 필름이 군데군데 끊기더라. 간만에 유쾌한 술자리라 좋았노라’ 응수한다. 둘은 말로써 물리적으로 발생한 사건을 사실상 삭제한 것이다. 이제 이 둘은 서로가 추구하는 이미지(선을 지킬 줄 아는 부하직원과 넓은 아량을 가진 상사)를 서로 지켜주며 관계를 다음 단계로 밀어 올린다.


우리에게 의미를 남기는 이벤트들은 이보다 난도가 더 높다. 십수 년 전, 어린이집에서 첫째 딸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의 눈에 난 멍자국에 흠칫 놀란 적이 있다. 멍이 제법 검고 큰 데다가 어디에 우연히 부딪혀 생겼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마치 그 상처가 없는 듯 늘상의 대화를 이어갔고 웃으며 거길 나왔다. 자결권을 가진, 배우자와 원만한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의 이미지를 나는 지켜주려 했던 것인데, 돌아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그녀도 출근길에 그 멍자국의 유래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준비했을 터. 그렇다면 내가 어찌 된 일인지 오히려 물어봐주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회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고, 그녀는 명예회복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 후로 그 선생님과의 대화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빗나간 센스가 남긴 결과다.


그것이 ‘프로 일잘러’든, 스마트함이든, 관대함이든, 그저 좋은 사람이든, 특히 나 스스로를 정의하는 대표 이미지를 상대가 오역하거나 져버리는 경우 심각한 체면손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때를 위해 인류가 발명해 낸 것이 바로 사과다. 사과를 주고받음으로써, 둘은 실추된 이미지를 함께 회복하게 된다. 체면 복구는 둘 모두에게 일어난다. ‘저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에요’냐 ‘제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실수했네요’ 정도의 차이일 뿐,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과가 오가는 수 천 가지의 상황이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의 충족으로로 귀결되는 이유다.


관계의 질도 나아진다. 사과와 용서 모두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어렵사리 이를 해낸 이들은 보통 인격적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 더 어려운 것은 사과를 청하는 일이다. 언뜻 따지자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사과하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사과를 주고받는 일은 관계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둘 사이의 신뢰를 더 깊게 해 준다. 사과는 망가진 아이덴티티와 관계를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 그 이상을 실현시켜 주는 언어적 장치이다. 이는 때로 물리적 세계를 거스를 수 있을 만큼 강하다. 물리적 사건 자체보다 결국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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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으로 치자면 사과는 무너진 관계의 수리나 보수 정도가 아니라 ‘관계의 레노베이션’ 혹은 ‘관계의 재건축’이라 부를 만하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튼의 사과, 세잔(인상파 화가)의 사과,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사과(애플)를 각각 인간윤리와 과학문명, 현대미술, 그리고 기술혁명의 태동을 가져온 ‘인류 4대 사과’라 하는데, 인간관계의 언어적 상징으로서 필자는 여기에 한국의 사과(謝過)를 더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견해가 실제 사과가 오가는 복잡다단한 현실 모두를 반영하지는 못한다. 다소 긍정편향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과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일들이다. 문제는 ‘당신은 응당 받아야 할 사과를 받고 있는가?’이다.


사과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극명한 양극화를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을 예명으로 활동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한 연기파 배우가 최근 돌연 은퇴의사를 밝혔다. 청소년시절에 그가 저질렀던 비행에 최근 지인들이 털어놓은 그의 비위가 줄줄이 터지면서 그가 쌓아 올린 페르소나가 회복불가할 정도로 부서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법적 처벌까지 받았던 일이건만 대중은 여전히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라고 있다. 공인이 저지른 비위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물론 대중의 인기를 얻어 그 자리에 올라 부를 누렸으니 그에 대한 실망이나 배신감이 들기는 하겠지만, 그들에게 굳이 사과를 받아 과연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비행으로 실추된 한국인의 체면이 회복되었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체면은 지극히 사적인 개념이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공식사과는 법적책임에 곁들여지는 수사(修辭) 일뿐,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반면 일상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최소한 필자의 짧은 사회생활을 반추해 보면 그렇다. 한 직장에서 계속 얼굴 맞대고 지내야 할 동료와의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저 꾹 참고 누른다. 또 굳이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 보았자 상대가 아예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고, 나만 뒤끝 있는 인간으로 보일 것 같아 겁도 난다. 자신의 잘못으로 누군가의 공적 이미지를 실추시켜 놓고, 무대 뒤에서 알량한 저녁 한 끼로 퉁치려는 인간들도 있다. 어떻게 재보아도 잃을 것이 많은 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상에서 이렇게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마치 한(恨)이 되어 애먼 연예인들에게로 향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드라마도 마찬가지.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독 인기 있는 드라마에는 모두가 참아왔던 빌런에게 시원하게 한방 먹여주는 주인공의 ‘사이다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일종의 대리만족인 셈이다. 역시 현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과를 청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차 때문이다. ‘그때 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왜 등신처럼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을까?’ 하며 이불킥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독자에게도 있을 것이다. 몇 날 며칠 그때 그 순간을 이리저리 곱씹으며 그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죽였다 살렸다 반복한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곧 자기 비하가 몰려온다. 친한 지인과의 험담으로 씹어 삼키기도 하고, 심한 경우 그 상황을 '재구성'하여 홀로 자존심을 지켜내는 처절한 정신승리로 맺음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분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는 이렇듯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 과정에서 나도, 상대방도 전소(全燒)되며 하얀 잿더미만 남긴다. 어차피 내 일상에서 지워버려야 할 인간에 대해 그만큼의 정성을 쏟았다는 생각에 내 시간과 열정이 아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다. 필자가 누군가를 마주할 때, 제발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나와 상대방의 체면을 위해, 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웬만하면 사과를 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로써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대는 내 안에서 이미 잘게 잘게 씹혀 곤죽이 되어있고, 누군가를 열렬히 미워하는 못난 자신이 스스로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나만 홀로 속앓이를 한다는 생각에 상대를 마주칠 때마다 분노는 쌓여간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야 하겠지만, 이 관계는 이미 차가운 땅속에 파묻힌 지 오래다. 아깝다. 그/녀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기대할 수 있었던 기회들(사회적 자본, social capital)도 함께 매몰되어 못쓰게 되어버렸다.


진정 모두의 체면을 세우고 싶다면, 또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고 싶다면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사과를 청하는 순간 둘 모두의 체면에 일시적으로 금이 가기는 한다. 하지만 이를 두려워해 지체하거나 타인의 입을 빌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갈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고 제삼자가 얼기설기 봉합한 상처는 결국 흉터를 남긴다. 유튜브에서는 ‘사이코패스 상대하기’, ‘나르시시스트 상사와의 대화에서 이기는 법’ 등 실전 테크닉을 가르쳐주지만, 미안하다. 지금 내가 해야 한다. 다른 꼼수를 부려봤자 끝이 시원치 않다. 둘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어렵지만 빠른 길이다. 다만, ‘사과하라’처럼 건조하게 해서는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없다. 사과를 청하는 마음에 담긴 선의(善意)를 먼저 전달해 보자. 상대방과의 관계가 자신의 삶에 큰 의미임을 말해주자. 최소 ‘잘못했음’보다는 따뜻하고 촉촉하게 상대는 응수해 올 것이다. 누구나 선(線)을 넘을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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