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代를 맞는 X세대에게

수용성과 지천명(知天命)

by 김상연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2016년 봄이었다. 그전 해에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냈는데 가족과 친척, 친구들과의 저녁식사나 술자리가 거의 매일 이어졌다. 스스로 불쾌할 만큼 체중이 불었고, 불혹(不惑)에 진입하던 터라 건강에 대한 염려도 생겼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시작한 것이 달리기였다. 처음엔 시속 5km로 뛰어도 채 15분을 버티기 어려웠다. 빠른 템포와 강한 비트의 음악을 들으면 조금 더 달릴 수 있었는데, 영화 록키 4에서 주인공 실베스타 스탤론의 훈련영상에 배경으로 나왔던 음악이 특히 효과가 있었다. 강렬한 음악에 맞춰 달리다 보면 페이스를 초과해 몸에 무리가 갈 때도 있었지만 달리기를 할 때는 늘 그 음악을 틀어두었고, 두 달이 지나자 한 시간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쓰레기더미에 빠져있던 비루한 내 몸을 건져 올려 깨끗이 씻겨놓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10년이 지나 이제 50의 몸. 이른 새벽 출장 온 일본의 한 촌동네의 도로가를 달린다. 요즘은 신해철의 “그저 걷고 있는 거지”라는 노래를 듣는다. 웅장한 현악으로 시작하다가 여기에 메탈과 드럼이 더해지고, 울부짖는 듯한 일렉트릭기타 솔로로 음악은 끝난다. 가수의 나직한 목소리는 악기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주위가 소란스러울수록 속삭이듯 말할 때 더 집중하게 되는 청자의 심리를 적절히 활용한 것 같다. ‘정글 스토리’라는 한 망작(亡作)의 OST로 쓰인 곡인데, 가사가 짧지만 묵직하게 가슴을 때린다.


난 한 번쯤은 저 산을 넘고 싶었어.

그 위에 서면 모든 게 보일 줄 알았었지.

하지만 난 별다른 이유 없어.

그저 걷고 있는 거지.

해는 이제 곧 저물테고

꽃다발 가득한 세상의 환상도 오래전 버렸으니.

또 가끔씩은 굴러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난 아직 이렇게 걷고 있어.


익숙한 곡임에도 들을 때마다 눈앞이 흐려진다. 폼나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우아하게 달려봄 직도 하지만 난 왜 그런지 소리를 내지 않고는 울 수가 없다. 하지만 시간은 새벽 5시. 인적 없이 고요하다. 흐느낌과 훌쩍임이 반복되지만 괜찮다. 이제 어떤 발악을 해도 더 이상 내 나이 앞자리에 떨어진 “5”자를 피할 수 없음에서 오는 억울함과 무력함, 조용히 사그라지는 젊음과 그로 인해 더 이상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넘치는 시간을 주체 못 해 그저 허비하던 20대의 나에 대한 원망과 후회, 기어이 한국행을 택해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잘 살고 있냐는 자책, 또 이런 생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연민, 얼마 남지 않은 날들 동안 과연 무엇을 더 이뤄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이 그 눈물에 섞여있던 것 같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의 중년들은 공감하리라.


2024년 국가데이터연구원의 발표자료(2025년 2월 발간)에 나타난 스트레스 인지율(지난 2주 동안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느낀 편이다’ 혹은 ‘매우 많이 느꼈다’고 응답한 비율)을 연령대로 그려보면 최고점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종모양이 드러난다. 10대(27.4%), 20대(33.6%), 30대(40.3%)로 오면서 꾸준히 상승해 40대(45.2%)에 정점을 찍고, 드디어 50대(41.7%)를 기점으로 꺾이기 시작한다. 60대 이상(36.3%)에서는 그 하락세가 더 두드러진다. 데이터를 업(業)으로 하는 필자에게 이런 패턴은 매우 흥미롭다.


이 곡선이 의미하는 한국 중장년의 정서는 무엇일까. 보고서에 포함된 다른 데이터로는 알기 어렵다. 이와 유사하거나 반대되는 포물선 모양의 차트가 없기 때문이다. 50대 들어 드디어 한국 사교육의 늪에서 탈출했기 때문일까. 주관적인 지표이긴 하지만 교육비부담도(자녀 교육비가 가정 경제에 ‘약간 부담스럽다’ 혹은 ‘매우 부담스럽다’고 답한 비율)에서 40대(62.3%)와 50대(62.9%)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볼 수 없다. 내 첫째 아이도 이제 갓 대학에 입학했고, 둘째까지 대학을 보내려면 앞으로 7-8년 동안은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실업률(40대 1.9%, 50대 1.8%)에서도 두 연령대간 차이는 없다. 직장 만족도와 소비생활 만족도는 오히려 50대(각각 34.3%, 21.8%)에 비해 40대(각각 36.9%, 23.0%)가 높다. 가족관계 만족도와 여가생활 만족도는 나이가 듦에 따라 꾸준히 우하향하는 슬픈 모습이다. 모두 스트레스 인지율에서 본 패턴을 설명하지 못한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히 남아있다.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한 장르로, 빈곤, 가정불화,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는 부모 등 고위험 환경에서도 건강한 성인으로 자란 아이들이 가진 공통요소들을 추적해 얻은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위기나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재정의 할 것, 자신의 역량을 믿어줄 것, 주위 인간관계를 적절히 활용할 것 등 인생 조언들이 가득하다. 이 개념은 ‘회복’, 즉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감과 그것이 가능함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회복은 불가능하다. 회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겪게 되는 일들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회복에 이르는 방법 역시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기계적으로 정형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살아온 길이 달랐던 만큼 회복의 방식이나 속도가 다르지 않을까.


성숙의 과정은 수용에 더 가깝다고, 죽음에 대해 글을 쓰는 한 동료교수는 말한다. 타인의 무례함이나 관계, 맞닥뜨린 현실 받아들이기를 반복하면서 드디어 자신을 발견하고, 그 몸과 마음을,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마저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진수. 본격적인 수용이 시작되는 나이가 아마 50대일 것 같다. 눈에 띄게 깊어지는 주름과 빠지는 머리카락, 매일 조금씩 흐려지는 기억력. 이제 회복은 없다.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나 깨달음도 깊어진다. 나의 기질과 성격,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내 몸에 받지 않는 음식, 주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들. 젊음으로 힘겹게 부여잡고 있었을, 진작 포기했어야 할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늙어진 몸과 마음을 조금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꾀가 생겨나는 시기가 50대 아닐까.

회복이 가능했던 20-30대와 가능하다 믿었던 40대. 젊음을 무기로, 때로는 억지로 당겨대던 용수철은 이제 탄성한계에 달했거나 이미 초과한 상태. 이제 더 당길 수도 없고, 손을 떼어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늘어나 탄력을 잃은 이 용수철은 그 나름의 용처를 찾아야 한다. 잘 찾아내기만 한다면 삶은 오히려 쉬워진다. 자신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생긴 대로, 내 몸과 마음이 허락하는 것들을 그저 해나가면 된다.


성시경의 감미로움보다 최백호의 묵직함과 무심함에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한국의 50대. 40대에 정점을 찍었던 스트레스 인지율이 50대에 와서 해소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때 비로소 자기수용(self-acceptance)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일 것 같다.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 ‘러너(runner)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자신이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여러 차례 설명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선명한 것은 그것이 그의 몸에 맞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쟁이나 몸싸움을 싫어하고 순발력도 뛰어나지 않은 그의 몸뚱이를 그는 받아들이기로 했고, 작가로서 가지게 되는 반사회적이거나 어두운 생각들을 정화시키기 위해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오래 달리는 것뿐이었다.


미국에 살던 어느 일요일 동네 벼룩시장에서 마주친 한 무명작가의 그림을 기억한다. 제목은 자화상. 그림 안에는 중년의 여성이 캔버스에 한 여자 아이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제목으로 보아, 이 화가는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 아이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가 있었지만 그 속에 오묘한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무언가 그 나이에는 버거운 일을 힘겹게 해낸, 아직은 그 과정에서 겪었던 쓰라린 상처를 아파하면서도, ‘나 잘했지?’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느낌이랄까. 지금도 내 어딘가에 천진하고 장난기 많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는 힘겹던 나의 나날들을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바꾸고, 당시의 나를 그때의 어린 나로 치환해 보니 곧 이 아이가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또 한없이 가엾게 느껴진다.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낸, 이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들어섰을 X-세대(그 독특한 성향을 뭐라 정의하기 어려워 한국은 미지수 X로 우리를 통칭했다). 늙어감에 서글퍼지는 50대. 하지만 수용과 지혜의 50대다. 가족을 포함한 타인의 인생들을 어깨에 이고진, 유독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한국의 50대. 힘든 세월 버텨낸 자신을 대견하다 칭찬하자. 모든 걸 이루었지만 아직 무엇도 이루지 못한 50의 X-세대. 이제는 받아들이고 생긴 대로 살아볼 때. 나쁘지 않다. 그저 걸어갈 뿐이다.

데이터로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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