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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지는 K팝의 정체성

문제는 ‘케이’ 아닌 ‘팝’. 보사노바에서 답을 찾는다.

by 김상연

“이게 K팝 맞나?” 그래미 신인상 후보에 오른 하이브의 글로벌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를 두고 한국 언론은 묻는다. 지금 우리는 케이팝이라는 이름에 붙어 있던 ‘K’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KATSEYE - Photo Credit_ Jane Kim.jpg 출처: 그래미어워즈 [https://www.grammy.com/news/everything-to-know-about-katseye-global-girl-group-k-pop]

캣츠아이는 하이브와 UMG(유니버설 뮤직 그룹)가 기획한 다국적 걸그룹이다. 멤버 6명 중 5명이 미국·스위스·필리핀 등 외국계이고, 한국인은 윤채 단 한 명이다. 주 활동 무대 역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발표하는 주요 곡들 모두 영어 가사 위주의 글로벌 팝이다. 데뷔도 한국 음악 방송이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 촬영된 오디션 프로그램 ‘더 데뷔: 드림 아카데미’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팀이 그래미 신인상과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에 동시에 후보로 오르자, 한국 언론은 “K팝의 쾌거”라고 환호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을 과연 K팝이라 불러도 되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캣츠아이는 전통적인 K팝보다는 미국 팝의 연장선에 가깝다. ‘Gnarly’는 하이퍼팝·익스페리멘털 팝으로 분류되고, 제작과 작곡진 역시 미국·유럽계 인력들이 중심이다. 뒤이어 나온 ‘Gabriela’는 라틴 팝과 R&B를 결합한 영어·스페인어 곡으로, 스포티파이와 빌보드 글로벌 차트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이 활용하는 음악적·시각적 장치에도 한국적 정서나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의 평론가들이 이들을 두고 “K팝 시스템이 만든 A팝(미국 팝)”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다. 실제로 해외 음악 매체는 캣츠아이의 이번 앨범이 여러 장르를 섞으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팝 문법을 모은 콜라주에 가까울 뿐 뚜렷한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들의 음악을 K팝이라 부를 것인가. 언어? 그렇다면 영어·스페인어로 노래하는 캣츠아이는 그 범주 밖에 있다. 활동 지역? 이들의 음악은 미국 시장을 향해 있다. 멤버의 국적? 한국인은 6명 중 1명뿐이다. 아. 제작과 기획방식이 한국적이긴 하다. 혹자는 바로 이 점을 들어 국적은 본질이 아니다. K팝의 핵심은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연습생 선발, 퍼포먼스 중심 기획, 세계관 설정, SNS·숏폼을 엮은 팬덤 동원 전략 등은 확실히 한국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스타 시스템이며, 지금의 캣츠아이는 그 시스템의 성공사례일지 모른다.


그러나 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마저도 완전히 새로운 한국적 개념이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모타운(Motown)의 음악 제작 방식은 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 산업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창립자 베리 골디(Berry Gordy)는 자동차 공장의 라인 생산 방식을 음악에 적용해 작곡·편곡·연주·보컬·이미지 트레이닝을 분업화했다. 전문 작곡팀이 히트 공식을 만들고, 하우스 밴드가 모든 곡의 연주를 담당함으로써 모타운 특유의 일관된 사운드가 탄생했다. 아티스트는 발성·마이크 테크닉·무대 퍼포먼스·패션까지 철저히 브랜드화된 완성형 스타로 훈련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오늘날 케이팝의 기획형 제작 시스템과 닮은 ‘히트 공장(hit factory)’ 모델의 원형이 되었다. K팝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거듭할수록 K팝에서 ‘K’의 색깔은 점점 희미해진다.


한국인 멤버가 한 명뿐인, 영어로 노래하는, 미국 기반의 하이브식 걸그룹이 K팝의 쾌거로 기념되는 지금, K팝은 분명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성장해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정체성에 대한 심대한 도전을 경험하고 있다. “K팝의 세계화가 K팝의 탈(脫) 한국화를 의미하지는 않는가”라는 불편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음악에 대한 전문성은 일천하지만, 필자는 정체성 논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관점의 전환에 있다고 본다. 케이팝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일관되이 앞의 ‘K’를 문제 삼는다. 멤버들의 국적이 다양해졌고, 가사 전체가 영어에, 활동 무대도 LA·도쿄 등지로 확장되었으니 “이게 아직도 K팝이냐”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작 위기를 만들고 있는 단어는 ‘K’가 아니라 뒤에 있는 ‘팝’이다. 케이팝은 늘 팝의 한 갈래라는 자기 정의 안에 갇혀있다. 힙합·R&B·EDM·트랩 등 여러 팝 장르를 혼합하고, 그 위에 군무·세계관·팬덤 시스템을 덧입히는 방식이다. 이 구조에서는 아무리 ‘K’를 강조해도, 결국 기준점은 글로벌 팝 문법에 얼마나 충실한가로 수렴된다. 차트에 오르려면 미국 팝 라디오에 어울리는 곡 길이, 스트리밍 플랫폼에 유리한 후렴 구조, 틱톡에 맞는 훅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K’는 수식어일 뿐, 본체인 팝은 변하지 않는다.


‘K’가 아무리 독특한 색을 내어도, 팝이라는 공통분모 안에 얌전히 들어가는 순간, 케이팝은 본질적으로 “서구 팝 시장의 룰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하위 모델”로 축소될 태생적 한계를 안게 된다. 엔터테인먼트 기업 입장에서는 그게 그나마 안정적인 시장 예측을 가능케 하는 유혹적인 길이겠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그건 이미 존재하는 글로벌 팝 문법에 ‘K’를 적당히 섞어 넣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 구조 위에서는 오늘의 캣츠아이도 내일의 또 다른 글로벌 걸그룹도 모두 비슷한 사운드와 서사를 공유하게 될 뿐이다.


브라질의 보사노바는 우리의 K팝과 그 궤적이 다르다. 삼바는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중음악 양식이었지만, 1950~60년대 리우의 신흥 중산층은 삼바의 리듬에 재즈의 화성과 도시적 세련됨을 얹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핵심은 혼합 그 자체가 아니라 혼합의 결과가 회귀불가능한, 독립적인 규칙을 갖게 되었느냐다. 보사노바는 바로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리듬부터가 다르다. 기타 한 대로 삼바의 빠른 퍼커션 중심 싱코페이션을 느리게 축약한 ‘바찌다(batida)’를 전면에 세웠고, 그 결과 축제에 어울릴법한 삼바와 달리 아파트 거실이나 작은 바와 같이 개인적인 공간에 걸맞는 친밀하고 낮은 음량의 리듬으로 재구성되었다. 화성 또한 단순히 재즈풍이 아니다. 7도, 9도, 11도 화음 같은 재즈 화성이 동원되지만, 그것은 즉흥연주를 위한 확장이라기보다 도시적인 멜로디와 정서를 만들어내는 음악적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에 속삭이는 보컬, 과잉을 배제한 발성, 말하듯 흘러가되 리듬에 정확히 붙는 창법이 더해지며 ‘삼바+재즈’라는 산술적 결합을 넘어서 보사노바만의 독특한 음색이 완성된다.

ab67616d0000b2739c01190dd4c6966c17f84927.jpg 출처: 스포티파이 [https://open.spotify.com/album/6Uo4Sib9WWHfOteKU1WdZF]

이처럼 보사노바는 삼바나 재즈의 하위 카테고리가 아니라 둘 중 그 어디로도 환원되지 않는 제3의 화합물이 되었다. 부드럽지만 느슨하지 않은 리듬, 차분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화성, 밝음과 그늘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적 정서, 그리고 힘든 현실을 버텨야 하는 서민의 애환에서 중산층의 여유로움과 개인주의로 순연하던 당시의 문화전이가 한데 녹아들어 이 새로운 장르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보사노바의 고전 ‘이파네마에서 온 여인(The girl from Ipanema, Antonio Carlos Jobim)’을 누구도 ‘브라질리언 재즈’ 혹은 ‘B(Brazilian) 재즈’라 부르지 않는다. 수식어 하나 없이, 보사노바라는 단어 하나로 이 노래의 리듬이나 화성, 분위기와 정서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글로벌 대중은 이 장르가 브라질 태생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보사노바는 이미 고유명사로 세계 음악사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세계 팝 표준의 훌륭한 로컬 버전으로 남을 것인가, 전례 없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것인가. 궁극적인 해답은 후자에 있다. K팝이 처음부터 순수한 민족예술이 아니었음을 기억하자.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힙합·R&B·EDM 등 서구의 장르들을 실험적으로 혼합해 온 K팝은 본질적으로 하이브리드였다. 시티팝과 재즈, 국악과 일렉트로닉, 포크와 힙합이 교차하는 지점들, 인디밴드 사이에서 조용히 축적되는 시도들. 지금은 K팝이라는 거대한 브랜드에 가려져 있지만, 언젠가 그 실험들이 조화로이 엮여 기어이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한국은 그 적절한 조합의 비밀을 곧 찾아낼 것이다. 우리의 비빔밥과 김밥, 그리고 부대찌개가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데이터로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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