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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 인문사회의 봄

by 김상연

재수 끝에 드디어 중소기업진흥공단(중진공)의 지원을 받아냈다. 필자가 제안한 중소형 미디어업계 재직자들이 독립적으로 AI 에이전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석사 프로그램인데, 정부 지원으로 저렴하게 석사를 취득할 수 있어 인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름도 ‘AI미디어솔루션학과’. 미디어와 언론사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AI툴과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작년에 고배를 마셨던 터라 이번 성취는 더 달콤하다.


이제 영업의 시간. 공단에서 제시한 최소한의 수강생을 모집해야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는데, 제안서를 작성할 때 흔쾌히 협약서에 사인을 해주었던 미디어사 사장님들도 막상 사업 선정이 되어 수강생을 보내주십사 찾아가면 난색을 감추지 못한다. 공단에서 등록금의 절반을 지원하지만, 나머지 절반을 이용자와 재직자가 다시 반씩 나눠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 등록금에 비하면 적은 액수지만 수강생을 지속적으로 파견해야 하는 회사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늦깎이 한국 교수의 어설픈 영업이 계속되던 어느 날, 친한 지인의 소개로 한 메이저급 방송사와 연이 닿았다. 프로그램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지만, 나도 상대도 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대기업은 어차피 지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어지며 자회사 직원분들이라도 보내주십사 웃으며 손을 꼭 잡아 보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같은 날 지친 오후, 예상치 않았던 전화. ‘이 프로그램을 단기 집중코스로 만들어 주실 수 있으세요?’ 오전에 만났던 방송사 책임자가 제안한다. 됐다! 이거라도 우선 해보자.


불안이 급습해 온다. 계획했던 프로그램 시작은 내년 3월. 사업 제안서가 담긴 종이 쪼가리 외에 딱히 준비된 것이 없다. 함께 사업 제안서를 완성했던 집필진과 교내 교육사업센터에 도움을 요청해 함께 실습 위주로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선수들을 어렵사리 강사로 섭외한다. 두 주 동안 이들을 한날 한 곳에 모으는 일은 더 어렵다. 거의 매일 전화는 바쁘게 돌아가고, 처음의 강의 일정은 해체와 재조립을 반복한다. 견적서 작성도 처음. 실습 때 필요한 서너 개의 생성형 AI 구독료만도 수강생 한 명당 30만 원이 넘는다. 다른 비용들을 이리저리 돌리고 깎아 탐욕을 덜어낸다. 행정비용을 빼고 나면 학교로 돌아가는 순수익은 거의 제로. 그럼에도 기한 내에 프로그램 구성을 마쳤음에 안도를 느낀다.


영상제작, 프로듀싱, 경영지원 등 다양한 분과에서 자원 혹은 타의로 선발된 약 40명의 직원들은 2주간 매일 4시간씩 강의에 몰두해 주었다. 이런 식의 강의 경험이 처음인 강사진도 수강생들의 관심사와 지식수준에 맞춰 거의 매일 강의안을 새로 뜯었다 붙이며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프로그램은 순항을 이어갔고, 드디어 마지막 개인 프로젝트 발표날. 짧은 영상과 단순한 사무자동화 에이전트였지만, 결과물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필자의 어렴풋하던 신념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코딩의 장벽은 허물어진다. 결국 튼튼한 기본기, 그리고 축척된 현장경험과 기획력이 빛을 발하리라. 몇 가지 새로운 툴들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수강생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영상은 제작자가 아닌 한 피디의 습작이었다. 카메라 운용이나 편집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오랜 연출경험이 있었다. 주제에 맞는 적절한 화면구성, 구도와 색감, 화면의 시퀀스에서 우러나는 감정과 스토리라인에 너무도 친숙한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체화된 기본기가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바로 훌륭한 콘텐츠로 형상화될 수 있음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에이전트 분야에서도 매번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련의 업무들을 하나의 플로우차트로 엮어 행정 간소화를 시도한 것들이 호응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복잡다단하고도 파편화된 일상의 업무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 간의 연관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유경험자의 통찰, 그리고 그 부산물의 용도와 가치를 상상할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이다. 이렇듯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AI시대는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무대로의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20180903000073_0700.png 출처: 뉴스웨이. https://www.newsway.co.kr/news/view?ud=2018090309441006885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로스쿨을 포함한 소수의 전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과계열은 한국에서 여전히 비인기 학문이다. 교육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자율전공제. 올해부터 약 20-40%의 대학 신입생들이 전공을 정하지 않고 입학해 한 해 동안의 수강경험을 토대로 전공을 정한다. 우리 학교의 경우 자율전공제로 입학한 학생들의 약 절반 가량이 공대에 지원했다. 이들 인기학과들은 넘치는 초과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강의시수와 실험공간 확대로 분주하다. 주로 인문계열에 속한 비인기 학과들에서 내어 놓은 신입생 TO가 고스란히 그리로 흡수된 것이다. 학교에 의대가 있었더라면 공대 역시 우리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더 허탈해진다.


2020년 필자가 한국으로 전적하던 때 만해도 인공지능 업계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국가과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의 공대교수들이 구름 때처럼 몰려든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연구실에서 독자 개발한 인공지능 모델의 성능에 대해 힘주어 발표한다. 손상된 fMRI 이미지를 복원하는 모델, 구두로 전송된 수치를 텍스트로 전환해 주는 모델,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모델 등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제 이 시장은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과점하는 체제로 재편되었다. 형태나 분야를 막론하고 매일 더 많은 양의 데이터가 이들의 서버로 집중되고 있으며, 이들의 인공지능 엔진은 그만큼 더 강력해진다. 이처럼 기술시장은 대개 표준화로 귀결된다. VHS 비디오, 네이버와 구글, 갤럭시와 애플이 살아남은 과정이 그렇다. 시장질서의 변화는 곧 인력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 2023년 11월 메타(Meta)에서는 약 11,000여 명의 사원을 해고하였는데, 이중 약 60%가 개발자였다. 프롬프트 활용으로 최상위 개발자들의 생산성이 폭발하자 그들을 보조하던 컴퓨터 공학도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The-Rise-of-Low-Code-and-No-Code-Platforms.jpg 출처: I GENESYS [The Rise of Low Code and No Code Platforms]

신기술이 안정화 혹은 대중화됨에 따라 시장은 부가가치 창출로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동일한 기술이라도 사용자의 관점과 역량에 따라 거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결과물에 큰 차이가 생긴다. 이번 단기교육에서 본 명제에 대한 필자의 신념은 더 뚜렷해졌다. 탄탄한 기본기와 도구로서의 AI 활용 능력만 있다면, 문과 전공생도, 사회과학을 공부한 현업인도 새 시대, 새 판의 주인공으로 도약할 수 있다. 충분한 읽기에 기반한 토론능력, 철학, 독립적 사고를 통한 논리적 추론, 예술사, 수학과 통계, 심리학, 일상다반사로부터 새로운 패턴이나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상상력과 기획력 배양이 오히려 학습의 중심으로 복귀해야 할 때다.


강(江)의 표면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지만 바닥의 물살은 무겁고 느리다. AI가 가져다줄 수 있는 미래는 우리의 현실 어딘가에 이미 와있건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갈 방송사 직원들. 동료들 모두가 그들을 기대의 시선으로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뭘 얼마나 배워왔나 보자’, ‘그런다고 바뀌는 거 없다’, ‘연봉을 더 받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주윗사람 힘들게 하느냐’와 같은 핀잔과 비아냥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수는 결국 다수를 움직이고야 만다. 그들이 일관되이 (알고보면) 타당한 주장을 한다면 말이다. 소수의 의견은 처음 다수의 무게에 눌려 무시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다수에 속한 이들 중 누군가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일리 있는 소수의 의견은 그렇게 시간을 두고 상대의 내적 태도변화를 일으키며 종국에는 다수의 설득을 가져온다. 한 줌의 모래를 조금씩, 한곳에 집중해 흘리다 보면 어느새 익숙한 모양의 작은 언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인문사회의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가져다준 의외의 선물. 변화에의 의지와 일관된 노력이 필요한 때다. 필자의 프로그램이 이 봄을 앞당길 수 있는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 본 과정에 지원을 원하는 독자는 필자를 찾으시라. 010-5...

데이터로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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