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웨덴 위에 한국

헬조선과 복지천국

by 김상연

“디쥬잇런치옛(Did you eat lunch yet)?” 내가 묻는다. 상대는 유럽에 소재한 대학의 교환학생 입학 담당자. 우리나라와는 달리 밥 먹었냐는 인사가 흔치 않은 스웨덴에서 나는 굳이 이 질문으로 대화를 열어본다. 뜻밖의 질문에 조금 놀란 눈치이지만 아시안이라 그러려니 하며 대부분 미지근함에서 따뜻함 사이의 반응은 보인다. 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내 손에는 학교에서 홍보물로 제작한, 여행용 칫솔과 치약이 든 기다란 플라스틱 막대가 서너 개 들려 있다. 따로 더 말을 더하지 않더라도 필자가 건네는 홍보물을 열어보며 그들은 작은 실소를 터뜨린다. 부디 그들이 우리 학교의 이름이라도 기억하길 바라는 간절함이 낳은 사소한 자작극. 사실 이 질문을 던지기로 한 것은 우리가 출장 전 궁여지책으로 챙겨 온 홍보물이 치약칫솔 세트였기 때문이다. 흔해빠진 볼펜과 텀블러, 항공편으로는 운송이 어려운 휴대용 핸드폰 배터리를 제외하고 나니 남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참 열심히 산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해본다.


이곳은 스웨덴 예테보리(Göteborg)의 한 컨벤션 센터. 올해 유럽 국제교육협회(EAIE; European Association for International Education)의 연례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유럽을 포함, 세계 수백 개의 학교가 이곳으로 날아든다. 여기서 각 대학의 국제처 직원들이나 유학원 관계자들이 서로 만나 협약을 맺고 유럽은 세계로, 세계는 유럽으로 자대 학생들을 내보낼 기회를 찾는다. 최근 국제화 지수가 대학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실제로 학생 교류가 가능한 학교와의 협약을 성사시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 대학에서도 여럿 오지만 요즘 외지인에 대한 미국의 공기가 차갑기도 하고 우리 학생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학비도 만만치 않아 유럽대학이 더 인기다.

예테보리.png

스웨덴, 벨기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체코, 스위스, 노르웨이. 우리 학생들이 가보고 싶어 할 만한 곳에 있는 학교들을 물색하고 사전에 모임 일정을 잡는다. 대부분의 만남은 30분 이내. 우리 학교 주요 학과의 국내랭킹, 유럽 학생들이 수강할 수 있는 영어 교과목 리스트, 단기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긴 슬라이드를 준비하지만 ‘얘들이 기억이나 할까’하는 염려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짧은 만남을 나누는 곳. 명함과 노트필기가 남기는 할 테지만 상대가 우리 학교의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팬들에게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라는 한 아나운서의 질문에 ‘기억이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한 타블로 씨의 절절함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초조한 마음. 무엇이든 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총 이틀 반나절인 이 행사에서 우리는 첫날 만났던 이들을 둘째 날 다시 찾아가기로 한다. 같은 시간 다른 학교 관계자를 새로 만나는 것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기회다. 여기엔 강한 의지의 표출 이외에 한 가지 포석이 더 있다. 초면(初面)은 구면(舊面)이 된다. 초면에는 할 수 없던 이야기나 행동들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지고 주제의 스펙트럼도 넓어진다. ‘점심은 드셨어?’와 같은 질문이 의외이기는 할지 몰라도 더 이상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통상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나 물건을 나눌 때, 사람들은 처음 마주하는 상대도 친근하게 느낀다. 친해서 그런 대화나 선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대화와 선물이 잠시나마 상대를 지인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나는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였는데, 대대적인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학교 이름 정도는 기억하겠단 나름의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유럽에서의 첫 영업을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쓰담쓰담하며 숙소로 가는 우버에 오른다. 잠깐. 며칠째 만났던 우버 기사들은 모조리 중동계. 콘퍼런스에서 만났던 화이트칼라들과는 피부색과 언어에 있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치 여기는 인종에 따라 직종이 나뉜 계급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잊고 있었던 스웨덴에 대한 단상들이 머리를 때린다. 내가 그들에게 던진 메시지가 최선이 아니었음에 이내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생각은 스웨덴의 실패한 이민정책에서 시작되었다. 2015년 시리아와 중동, 발칸반도와 아프리카에서 16만이 넘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지만, 스웨덴 정부는 이들을 사실상 격리수용하였고, 고등교육과 사회진출의 길이 막힌 이들이 주류사회와 고립되며 슬럼을 이루었다. 이민 1세대들이야 새 땅에서 기회를 찾은 이방인 신분이라 저임금으로라도 일상을 누리게 된 것에 만족했지만 그들의 자녀 세대는 달랐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스웨덴 사람임에도 서자(庶子) 취급을 받으며 취업과 교육시장 모두에서 차별을 겪어야 했고, 이들의 적체된 불만은 이제 내전을 방불케 하는 조직적 폭력시위로 진화해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을 매년 마이너스로 찍어 내리는 중이다.

헬스웨덴.png 출처: 반이민 정서 확산... 스웨덴도 극우 바람 [한국일보]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에게도 신분 상승의 길은 막혀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를 실현하고 있는 스웨덴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실현하고 있는 스웨덴에서 납세자들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에, 학업 기간에는 국가에서 용돈까지 받는다.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 역시 연간 상한액이 책정되어 있어 의료비 폭탄으로 망할 일이 없고, 노후에도 현역 시절 급여의 절반 수준에 달하는 연금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eedman)의 말마따나 ‘공짜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a thing like free lunch)’.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세금을 부른다. 스웨덴의 근로 소득세 기본 세율은 32%로, 한국의 최저 세율인 6.6%의 약 다섯 배. 특히 연봉이 한화 약 8,000만 원을 넘어서는 ‘고소득층’에게는 과세표준 초과분에 대해 20%의 국가세가 추가로 부과된다. 쉽게 계산해 연 소득이 한화 1억인 경우,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약 3,600만 원.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세금을 내려면 연봉이 2.2억 이상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두 배가 넘는 25% 부가세로 중산층의 가처분 소득은 더 줄어든다. 스웨덴 국세청은 매년 ‘세금달력(Taxeringskanlendern)’을 배포, 납세자 개개인의 상세한 소득 정보를 공시해 탈세 방지를 위한 간접 상호감시 시스템을 작동 중이다.


여기에 낮은 법인 세율과 상속세 폐지로 부의 대물림은 쉽게 이루어져, 상위 1%의 부유층이 전체 국부의 37%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 스웨덴이다. 평등한 소득 수준에 비해 기형적이리만치 불평등한 자산 집중도다. 이러한 경제구조 하에서는 일반 국민이 부를 축적하기 어렵게 되고, 개인의 출셋길은 그만큼 제한된다. 스웨덴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복지는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욕망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깡통을 찰 일도 없지만, 부자가 될 일도 없다. 소수의 부자를 제외하고 나면, 나름 안정적이고 평등한 사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느낌이다. 반면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에 몸부림치면서도 매일 기울어진 운동장 위를 경쟁하듯 달리는 ‘다이내믹 코리아’. 당신은 둘 중 어느 곳을 택하겠는가.


이른 아침 출근해 회사 우편실(mail room)로 들어간다. 거기엔 나를 포함한 모든 직원의 문서 수신함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각 메일함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작게 적혀있다. 내 메일함에 노란색 편지봉투가 눈에 띈다. 인사과에서 온 편지. 작년 한 해 나의 퍼포먼스가 기준에 미달해 연봉을 10% 삭감하겠단다. 아침부터 기분이 언짢다. 자연스레 주위 다른 메일함을 둘러본다. 다들 노란 봉투가 하나씩 꽂혀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작은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모두 나와 비슷한 처지임을 생각하니 위안이 된다.


다시 우편실. 같은 색 편지봉투. 이번엔 작년 실적이 훌륭해 올해 연봉을 10% 올려주겠단다.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해진다. 주위를 둘러본다. 동료들의 메일함에 이 노란색 봉투는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만 주어진 성과급. 마음이 하늘을 난다.


타인과 같아지고 싶은 욕구는 대개 불안에서 비롯된다.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마음의 안전지대를 확보하려는 수동적인 본능이다. 뒤처진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기를,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이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자신을 방어하거나 실패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타인과 차이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이는 어제의 자신을 초월해 오늘 새로운 자아를 찾을 때 그 결과로써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며, 찰나이긴 하지만 깊은 행복감을 선사한다. 개인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확실한 방법이다.


독자는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낙오자도 없지만,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스웨덴인가, 가난에 허덕일 수도 있지만, 부를 꿈 꿀 수 있는 한국인가. 그날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이렇게 시작해야 했다. “Your kids can be rich in South Korea!”

데이터로 문화를 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족회복탄력성: 힘들 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