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족에 든 힘을 빼야 할 때
윔블던의 잔디 위에서 두 남자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 2010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진 남자 단식 1회전. 미국의 존 이스너(John Isner)와 프랑스의 니콜라 마위(Nicolas Mahut)는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마치 전쟁 같은 마라톤을 치른다. 초반부터 경기는 팽팽하다. 강력한 서브를 앞세운 이스너와 끈질긴 수비로 맞서는 마위. 어느 쪽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세트 스코어 2-2로 균형이 맞춰진 순간, 관중들은 이미 이 경기가 평범한 승부가 아니란 걸 직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후 벌어질 역사는 예측하지 못한다.
마지막 5세트. 승부는 끝날 기미가 없다. 게임 스코어가 10-10, 20-20, 30-30으로 치달을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놀라움과 환호가 교차한다. 이스너는 시속 200km대의 강서브로 숨을 이어가고, 마위는 온몸을 던지는 리턴으로 응수한다. 두 선수는 마치 기계처럼 끝없이 코트를 누빈다. 해가 저물어 경기가 중단되었다가, 이튿날 재개. 그러나 여전히 승부는 나지 않는다. 선수들의 표정에는 피로가 역력하지만, 라켓을 휘두르는 손은 굳건하다. 기립한 관중.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심판.
이틀째 경기가 다시 중단되고, 결국 세 번째 날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날 오후. 스코어 70-68. 이스너의 백핸드 패싱샷이 마위의 코트를 때리고 지나가며, 잔디 위에 거대한 서사가 종지부를 찍는다. 경기는 무려 11시간 5분, 183게임에 걸친 대혈전. 역사상 가장 긴 테니스 경기라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는다.
아무리 프로라지만 어떻게 이런 플레이가 가능할까. 필자를 포함한 테린이(‘테니스+어린이’의 줄임말)들.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다들 원리는 알고 있다. ‘제발 몸에서 힘 좀 빼시라!’ 초짜들은 코트에 서는 순간부터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특히 자신이 되치기 좋게 날아오는 공을 쳐야 할 땐 힘이 더 들어간다. 대부분 코트를 넘기거나 네트에 꽂히며 플레이어를 맥 빠지게 한다. 연속된 실패에 멘털이 약해져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선수가 긴 랠리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불필요하게 몸에 들어간 그 힘 때문이다. 힘이 들어가면 정작 힘을 주어야 할 순간에 힘을 더 내지 못하고, 그 무게에 스스로 눌려 곧 지쳐 쓰러지게 된다. 장르나 종목과 관계없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나누는 지점이 바로 자신의 몸에서 힘을 얼마나 뺄 수 있느냐다. 골프나 달리기와 같은 스포츠는 물론 댄스, 바이올린, 회화와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굳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더라도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공감하리라 믿는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힘을 뺐다는 것은 힘을 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과 같다. 항상 힘이 들어가 있다면 자신이 힘을 준 상태와 뺀 상태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리듬과 역동성이 사라진 단조롭고도 고단한 퍼포먼스가 되고 만다. 몇 주 전 만났던 한 댄스 아카데미 대표의 말이 요새 팝 아이돌의 안무가 딱 그렇다는 것이다. 예전과 달리 신곡에 들어갈 춤 선(線)을 여러 안무가에게 맡기고 각자에게 받은 안무에서 가장 멋진 부분만 따다 편집해 붙여 넣는 것이 오히려 문제란다. 여기서 ‘가장 멋진 부분’이 바로 힘이 가장 많이 들어간 클라이맥스. 결과적으로 신곡에 어우러지는 춤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이 잔뜩 들어간, 아마추어가 봐서는 대략 멋지지만, 프로가 보기에는 정작 하이라이트를 찾기 어려워 제대로 된 흥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힘이 빠져 있어야 가끔 힘이 들어간 곳이 더 확연히 드러나게 되고, 연기하는 이와 보는 이들 모두 그 미묘한 대조에서 재미와 희열을 느끼게 된단다. 그는 분명 댄스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듯 보였다.
미국에서는 자식이 대학 기숙사에 입사하는 날이 부모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날이다. 그날은 필자의 사부가 아들을 대학에 보내던 날. 미니밴 하나를 꽉 채운 작은 살림살이를 함께 열심히 나른다. 더운 날이었지만 입사 시간이 짧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침대 배치를 놓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보내는 아빠도 떠나는 아들도 오늘은 참는다. 대충의 짐 정리를 마치고 이제 헤어질 시간. 사부와 사모는 얼른 차에 오른다. 차 밖에 서 있던 아들이 아빠를 바라보며 멋쩍게 손을 흔들지만, 부모는 애써 바라보지 않는다. 필자는 그에게 약간의 용돈을 건네고 역시 차에 오른다. 나는 사부가 아들에게 남길 것이 있어 차에서 다시 내리는 줄 알았지만 그대로 차를 달린다.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쯤, 사모가 드디어 참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 가족은 그렇게 그들의 “Let go! (보내주기)” 의식을 마친다. 건조함이 원하던 컨셉이라면 나름 성공적이라 하겠으나, 사부의 눈과 어깨에는 힘이 아주 잔뜩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지난달 칼럼을 마무리하려던 어느 수요일 새벽 5시.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이례적으로 이른 시간이라 바로 전화를 받는다. 화장실에서 나오다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이마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단다. 방금 다녀간 119 구조대원이 응급처치를 해주며, 문턱에 패인 상처가 제법 깊으니 해 뜨자마자 성형외과를 찾으라 했단다. 대학교 근처에 자취하던 딸도, 자덕(자전거 덕후)인 처도 마침 집에 없던 터라 가장 친한 대학 후배이면서 기러기 아빠인 나를 찾은 것이다. 바로 차를 몰고 그의 집으로 간다. 그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며 빨리 형수에게 알리라 한다. 그는 하지 못한다. 할 수 없단다. 지금 한참 즐겁게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즐기고 있을 처가 괜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단다. 일리가 있다. 어차피 지방에서 올라오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리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늙고 병들어도 항상 서로를 아껴주겠다 맹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왜 우리는 가족을 찾지 않을까. 아니, 찾지 못할까.
독자들도 이런 잔인한 순간들을 겪어 보았을 것이다. 정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닥쳐올 때 우리는 웬만해선 가족을 떠올리지 않는다. 우선 친구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한숨을 돌린 후에야 가족에게, 그것도 어렵사리 전화하는 것이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다. 내 부모와 배우자, 아들딸에게는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 우리 다 이해한다.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이 반복되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염려의 뒤편에 아쉬움과 섭섭함이 함께 자람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그때 거기 내 곁에 없었다’라는 뜻밖의 원망. 이 역시도 눈물을 삼키며 이 악물고 참기야 하겠지만, 스스로 그런 생각 자체를 지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당신에게, 또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가족이란 이름의 관계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인이 가장 큰 피로감을 느끼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아닌 척하는 꼰대 상사, 자기밖에 모르는 MZ 후배 자손들. 나보다 잘 나가는 대학 동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관계는 많다. 특히 회사는 공적 업무로 얽힌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 힘이 더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행복이나 슬픔에 관여할 수 있는 한계선은 명백히 정해져 있다. 그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에 대해 그들의 가족보다 더 걱정하거나 동정해서는 안 된다. 관계의 거리가 규정짓고 있는 암묵적인 룰, 바로 ‘오지랖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도대체 뭐길래?’라는 반문과 함께 멱살이 잡힌 자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이제 힘을 좀 빼라는 관계의 안전장치가 발동한 것이다.
가족. 좀처럼 힘을 빼기 어렵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렇게 늘 힘이 잔뜩 들어간 관계의 코트에서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오래 플레이할 수 없다. 피로는 곧 몰려오고 플레이는 재미가 아닌 기피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가족 간에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 혹은 ‘부모님께 서운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자신을 모두 바친 부모와 효심 가득한 자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온 힘을 주어 실이 왔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직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을 느껴보지 못했다.
명절이면 우리는 현금이든 선물이든 열심히 이고 지고 부모님을 찾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갑자기 피로함이 느껴져 곧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면, 그 현금과 선물은 당신이 의식적으로 준 힘의 무게 때문이다. 올 추석엔 힘을 좀 빼보자. 지난해 살면서 힘들었던 기억들을 조심스레 나눠보자. 부모나 형제, 자식도 좋다. 그들의 도움 없이 어려운 순간을 견뎌낸 자신을 그저 대견하거나 애처롭게만 생각하지는 말자. 이번엔 그들이 그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줄 수 있도록 힘을 살짝 빼보자. 그때 비로소 당신과 가족 사이에 관계의 리듬과 탄력은 생겨난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이 애써 지켜야 하는 책임이나 원망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내 편이란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저 그대의 그 힘 때문에 지금껏 스스로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