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
새의 행동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동물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그는 나와 맥주를 마시며 그렇게 자신의 전공을 소개했다. 딴에는 사회과학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를 하던 때라 동물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그의 대답은 너무 명료해 순간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는 비교가 필요하다. 알고자 하는 대상 그 자체만 보아서는 그것의 의미나 실질적 기능을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다른 생명체들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인간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넓혀간다. 여러 생물유전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오랑우탄이나 침팬지와 같은 유인원은 물론 개미나 벌의 행태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 둘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와 조건을 찾아나간다.
인공지능. 이제 더 강력한 비교군이 나타났다. AI에 관해 매일 폭우처럼 쏟아지는 뉴스와 영상 콘텐츠에 이제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어떤 직장이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빨리 대체될까에 관한 것이다. 화이트칼라가 가장 먼저 나온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 자동차, 엘리베이터 등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해방했던 과거의 기술혁명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기존 판례를 수집해 정리해야 하는 수습 변호사, 환자의 fMRI 이미지를 판독해 진단을 내려야 하는 전문의, 과거 유사 연구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연구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교수, 누군가와의 인터뷰나 취재 자료를 대중의 말로 옮겨야 하는 기자.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먼저 밥그릇을 잃게 될 직업군으로 꼽힌다.
당황스럽기도, 또 두렵기도 하지만 이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존하는 자료만 충실히 따르도록 학습시켜 두면, 자료 요약과 재구성쯤은 요즘 나온 생성형 AI가 웬만한 신입 변호사나 박사 학생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수행한다. 의료 이미지 판독의 경우 역시 의사보다 인공지능의 진단이 더 정확하다는 것은 여러 차례의 실험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언론사 기자들도 AI가 득세한 현실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시중에 나와 있는 생성형 AI 플랫폼에서 원하는 방향이나 톤을 알려주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꽤 그럴싸한 기사 하나가 곧 완성된다. 기사 작성이나 논쟁적 글쓰기 같은 수업은 왜 들었나 싶단다. 지금이야 문제가 기사를 작성하는 수준에 국한되어 있지만 언론인 개인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는 취재나 인터뷰의 영역도 안심하기는 어렵다. 예리하고도 통찰력 있는 질문. 과연 대기자만 할 수 있을까.
전공 특성상 통계와 데이터분석을 가르쳐야 하는 필자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몇 해 전만 해도 수업 전반부에는 코딩에 대한 강의가 필수였다. 그 과정에서 약 1/3의 수강생들이 강의실을 떠난다. 통계강의가 이어지면서 다시 1/3 정도의 학생들이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수강 정정 기간이 끝나, 하는 수 없이 몸은 강의실에 있지만 눈과 마음은 저 머나먼 우주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다.
작년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코딩은 물론 데이터 분석과 차트 작성까지 생성형 AI가 알아서 해준다. 일면 ‘문송’한 학생들이 데이터사이언스의 영역으로 약진할 수 있는 대전환기이기도 하지만, 교과과정의 절반 이상을 인공지능에게 내주어야 하는 필자는 교수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연구 보조로 함께 일하는 학부생들의 퍼포먼스를 보면 무력감이 이어진다. 데이터 분석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코딩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생성형 AI를 활용해 프로 수준의 데이터 분석과 논문 쓰기가 가능하다. 어떤 방향으로 논리를 이어 나갈지에 대한 나름의 아이디어만 있다면, 이를 실행하는 것은 더 이상 전문가에게만 허락된 영역이 아니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그 결과를 연구논문으로 출판하는 것이 본업인 학자에게 AI의 등장은 분명 기회임과 동시에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생산성의 폭발로 양질의 논문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학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화이트칼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위의 누구를 만나더라도 AI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슈다. 새로 출시된 AI 플랫폼의 성능이 어떤지, AI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지, AI가 특이점에 도달했을 때 세상은 어떻게 바뀌는지, 다양한 말들이 오가지만, 이들 사이에는 분명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AI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AI가 대체할 수 있는 한계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으로 귀결되는 이것은 바로 인류와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선(boundary condition),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으로의 회귀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유기체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멀고, 자연히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만큼 러프하게 남아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한 차원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인간과 더 가까이 닮아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객체와의 비교가 필요한데, 이제 AI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물론 AI의 등장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위협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인간다움에 대한 고찰과 이해를 격상시킬 수 있는 기회임 역시 분명하다. 인문학이나 사회심리를 통해 인간의 조건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이처럼 훌륭한 학습자료가 또 있을까. AI의 시대를 겪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분명 더 진화한다.
인공지능 기반 머신러닝과 사회심리에 대해 강의하는 필자는 의도치 않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인공지능은 최초 설계 때부터 인간의 뇌, 특히 신경세포의 행동을 모방하도록 만들어졌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이 일정 한계(역치[閾値])를 초과하게 되면 뉴런이 폭발하고 이것이 서로 연결된 다른 뉴런들의 연쇄 활성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지각과 인식이 이루어진다. 유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뉴런들의 폭발 시퀀스와 말초적 반응에 일정한 패턴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학습의 기본 단위가 된다. 학습이 반복되면서 세계를 읽고 이해하는 틀, 프레임(frame)이 생겨난다.
명칭만 다를 뿐 인공지능도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적절한 가중치와 활성함수(인간의 뉴런)를 활용해 모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입력되는 데이터에 따라 일정한 출력값을 산출하게 되어있다. 최초의 모델은 무작위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출력값 대부분은 오답이다.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수험생이 수능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핵심은 반복. 주어진 입력값으로부터 원하는 아웃풋을 산출할 수 있도록 조금씩 모델을 수정한다. 그리고 그 횟수가 만 번, 십만 번으로 늘어나면서 모델은 점점 정교해지며 제법 실측치와 유사한 예측치를 제시한다. 반복만큼 중요한 것이 데이터의 크기. 입력값으로 들어오는 데이터의 크기가 커질수록 모델은 한층 더 정교해진다. 기존의 것과 양상이 다른 데이터를 흡수해 모델을 꾸준히 수정하기 때문이다.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의 크기와 학습량에서 우리는 결코 기계를 능가할 수 없다. 수백만 번의 모의 대국(大局)을 경험한 알파고에게 한 번의 패배를 안겨준 이세돌 9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애석하게도 이와 유사한 광경에 놀랄 일은 앞으로 점차 사라질 것이다. 데이터의 크기와 컴퓨터의 처리 속도는 더 크고 빨라질 것이므로.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눈에 덜 뜨이는 차이점은 모델의 수정 가능성. 인공지능은 새로운 데이터가 들어올 때마다 자신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모델을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이는 학습이 계속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속성을 인공지능이 가진 유연함과 겸손함, 혹은 지성(intelligence)이라 말하고 싶다.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정보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이나 이론을 바꿀 수 있는 태도를 지성이라 정의한다면 특히 그렇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이 영역에서도 우리는 인공지능에 뒤지고 있는 형국이다. 자신의 이론이나 가설, 즉 프레임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를 팩트로 인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프레임과 일치하는 팩트만을 가치 있는 정보로 인정하거나 불일치하는 팩트를 거짓으로 치부하며 무시하기 시작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학습을 통한 지적성장이 서서히 멈춰가고 있다고 하겠다.
프레임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어떤 정보를 취하거나 버릴지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다. 그에 반해 데이터에 따라 꾸준히 모델을 수정하는 것이 인공지능의 업(業). 이 지구상에서 둘 중 누가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행동은 사실 우리를 인지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세계관을 부정하는 정보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그 세계관에 과몰입해 있거나 그것을 누군가와 공공연히 나누었을 때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일관성이 떨어지는 얕은 지식의 소유자로 낙인찍히느니 나를 공격하는 정보나 정보원을 공격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요즘의 토론에서는 어느 쪽이 맞는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반면 인공지능에게는 체면이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몰염치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현실에 대한 이해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보호해야 할 자아가 없을 때 배움이 더 유연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삶에 있어 어느 편이 더 나은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과의 비교에서 벌써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듯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