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이미 한국인
한글을 새로 배우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특히 영어권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더욱 그렇다. 한글의 위대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관계없이 한국말의 쓰임 자체가 그들에게는 매우 새롭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말은 우리가 얼마나 고맥락 사회인지를 잘 보여준다. 같은 행동도 맥락에 따라 동사가 모두 달라진다. 옷은 ‘입고’, 장갑이나 안경은 ‘끼고’, 모자는 ‘쓰고’, 양말이나 구두는 ‘신는다’. 영어 공부를 조금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영어권에서는 고민할 것 없이 위의 모든 상황에서 ‘wear’ 혹은 ‘put on’을 쓴다. 저맥락 문화권에서는 맥락에 관계없이 행동의 본질적 기능이 같다면 모두 같은 동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숙박을 마치고 나오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상점에서 값을 치르고 나올 때 모두 안내 데스크나 매대에서 ‘체크’하고 ‘나가기’ 때문에 상황에 관계없이 모두 ‘check out’을 쓴다. 우리말은 상황에 따라 ‘체크아웃’, ‘대출’, ‘계산’, 모두 단어를 달리 써야 한다. 저맥락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새로 배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외워야 할 단어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 특히 수직적 관계에 따라 동사의 어미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자주 접했던 ‘합쇼체’, ‘하오체’, ‘하게체’, ‘해체’, ‘해라체’만 해도 그들에겐 이미 머리가 아플 것 같다. 어떤 때는 ‘나’가 맞고 다른 때는 ‘저’가 맞단다. 어떤 때는 ‘우리’가 맞고 또 어느 때는 ‘저희’가 맞단다. ‘저희 나라’는 틀린 표현이라고 하고, 지칭하는 제삼자가 나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도 지금 상대방의 지위가 더 높다면 그 사람을 낮춰 부르란다.
이렇게 어렵디 어려운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기특하고, 예쁘고, 심지어 고맙기까지 하다. 전 세계 70억 인구 중 채 1%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희귀어인 한국말을 굳이 배워, 또 이렇게나 잘하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한국말 너무 잘하시네요’, ‘한국에 온 지 5년밖에 안 되셨는데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등등 칭찬 일색이다. 칭찬에 인색한 한국문화의 특성을 고려해 보면 완벽 현지화에 성공한 그들이 우리에게 실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칭찬을 주고받는 것은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다. 하지만 매번 같은 칭찬을 듣게 되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일터에서야 그들의 한국말 실력에 친숙한 동료들이 같은 칭찬을 반복하지 않겠지만, 편의점에서, 음식점에서, 동네 주민센터에서, 길거리에서, 휴양지에서 매번 자신의 한국말 실력에 감탄하는 한국인을 만나야 한다면 이는 오히려 스트레스나 당혹감, 혹은 실망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들인 노력에도, 칭찬은 여전히 그들이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칭찬, 주로 상대방의 능력에 대한 칭찬은 최소 두 가지 전제조건을 내포한다. 우선 상대방의 능력치가 기대치보다 높아야 한다. 기대치가 낮을 때 상대방의 능력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개연성이 높고, 따라서 칭찬이 일어날 확률도 높다. 다음으로, 칭찬하는 사람이 칭찬받는 사람에 비해 우월해야 한다. 자신보다 수학을 못 하는 친구들에게서도 칭찬받을 수는 있지만, 칭찬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내가 존경하는 수학 선생님께 받는 칭찬과는 그 가치의 무게가 현격히 다르다. 오히려, ‘네가 감히 나를 평가해?’와 같은 부정적 반응을 불러올 공산이 더 크다. 자,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듣고 있는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는 과연 칭찬인 걸까. 비판적으로 볼 때, 이는 그들의 한국어 능력에 대한 암묵적 저평가를 뜻하며, 특히 한국문화에 완벽 적응한 외국인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당신이 내 한국어를 평가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칭찬의 시발점은 다름이다. 상대방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면 굳이 칭찬하거나 나무랄 이유가 없다.
약 20여 년 전 미국에서 정착하던 때를 떠올려본다. 나름 영어에 자신이 있었던 나지만, 처음 몇 년간은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졌는데, 동기생들의 말이 빠르기도 하고 수업 주제에서 자주 벗어나기도 해서 책을 미리 읽어가도 수업 후 30분 정도만 지나면 곧 유체이탈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 날 오전에는 내가 가르쳐야 하는 학부수업이 연달아 세 개가 있다. 열심히 만든 슬라이드를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입으로 중얼거려본다. 최종적으로 곁에 있는 내 처에게 리허설을 해본다. 부자연스러운 곳이나 발음이 잘되지 않는 부분은 단어를 바꿔본다. 반나절 준비 끝에 드디어 잠을 청한다. 꿈을 꾼다. 동사무소에서 나온 직원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아. 맞아요, 저희 전산상에는 이번 입영 대상자 맞으세요’. 난 ‘제대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그를 따라간다. 같은 악몽을 수업 전날에는 예외 없이 꾸었던 것 같다. 매주 두 번, 첫 학기 내내.
학교 밖에서의 삶은 더 버라이어티하다. 식료품 가게 계산대에서 ‘Paper or plastic?’(계산한 물건을 종이봉투에 담아주랴, 비닐 봉다리에 담아주랴 하는 질문)이라는 점원의 선택 의문문을 알아듣지 못해 과감히 ‘예스’라고 답한 뒤 수치심에 집에 돌아와 소주를 들이켰던 기억. 집에 인터넷 설치를 위해 통신사 직원과 전화 통화를 해야 했는데, 사전에 자연스러운 대화 진행을 위해 플로우 차트를 열심히 그려놓고 결국 전화할 때는 ‘레귤러!(가장 저렴한 인터넷 서비스 상품)’만 연신 외쳐댔던 기억.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산부인과 의사와의 소통을 위해 암기해야 했던 여러 가지 필수 표현들과 의학용어, 그리고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 작성해야 했던 수많은 서류들. 이런 일상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 갔다.
한국에서의 그들의 일상이 이와 크게 다르겠는가. 직장에서의 바쁜 일상과는 별개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사투는 매일 반복된다. 분명 이런 일상들을 되풀이하며 한국에서의 생존을 위한 내공을 키우게 되고 결국 그들은 우리보다 한국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개만 보아왔던 사람보다 개와 고양이 모두를 보았던 사람이 개의 특성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쯤 되면 그들을 그저 우리와 같은 한국인으로 보아주면 안 될까. 한민족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던 탓에 우리 사회의 이문화 수용성은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변화가 빠르게 확산되는 나라도 없다. 인종적 동질성과 좁은 땅덩어리가 주는 몇 안 되는 큰 은혜중 하나다. 요즘에는 공중화장실 앞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거나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출입문을 잡아주는 풍경을 쉬이 찾아볼 수 있다. 몇 해 전 만 해도 이기적인 한국문화의 고질병으로 지적되던 것들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공공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이문화 인식 개선을 시작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다.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데이터로 문화를 봅니다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김상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