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인가? 우리는 왜 일본에게 지속적으로 과거사를 언급하고 사과를 요구하는가? 피로감이 밀려오는가?
2024년 8.15 광복절은 특별했다.
감춰져 있던 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도 기괴했지만 안보실장이 개비에스 뉴스에 나와 '중일마(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를 언급한 것은 가히 기념비적이었다. 사과할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어거지로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전두엽이 실종된 강약약강의 비굴한 인간들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이어서 안보실장은 '사과를 요구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낀다'라고 했는데, 듣는 일본이 피로하다는 건가, 요구하는 우리가 피곤하다는 건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뉴라이트 식민사관을 똑바로 잡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2024년 여름 고시엔에서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우승을 한 후 선수들과 응원단이 한국어로 된 교가를 부르고 그것을 NHK가 전국에 생중계 했다. 그것도 '동해 건너~'로 시작하는 정치적 논쟁을 부를법한 내용의 교가였다. (물론 NHK는 '동해'를 '동쪽 바다'로 자막을 바꿔 달았다). 역지사지로 한국 봉황기 야구대회에서 일본계 학교가 승리한 후 '다케시마 ~'가 등장하는 일본어 교가를 불렀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절대 용납 못했을 거라면서 한국어 교가를 용인한 일본이 역시 큰 나라라고 떠받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한테 배워야 한다며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좌파로 몰아세울 때도 있다.
참고로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싫어할 수 없는 깔끔하고 담백한 음식들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는 일본 친구들은 하나같이 모두 겸손하고 착하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결벽스럽게 싫어하고, 예의 바르다. 일본인들의 평균 독서량이 우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만으로 비교하자면 교양 수준도 우리보다 높다. 배울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을 좋아하고 배우는 것과 역사에서 짚어야 할걸 짚고 넘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피해의식에 쩐 소인배들이라서가 아니다. 역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전범 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각자 역사를 다루는 태도는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에 가깝다. 아래 뉴스 보도에서 보듯이, 독일은 그들의 침략과 강탈의 역사를 반성하고, 학교 역사책에도 낱낱이 기록하여 가르친다. 의도했건 안했건 나치에 복역하고 협조한 이력이 새롭게 드러날 때마다 피해자에게 배상의 책임을 질 뿐 아니라, 매년 독일 총리는 유태인 희생자 묘역 앞에 무릎 꿇고 참배한다.
반면, 일본은 전범들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두고 참배를 한다. 강제 노역과 성노예 역사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은 기록에서 지우려 하고 덮으려 한다.
두 나라가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일본과 다르게 독일이 기독교에 뿌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틴 루터의 나라 아니던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자백하는 행위, 즉 Repent(회개)하여 용서함을 받는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신 앞에서 회개를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사이에서는 Reconciliation(화해)이 일어나고 신으로부터 Redemption(구원)을 받게 된다. 독일 최장수 총리 메르켈의 소속정당은 독일기독민주연합당이다.
잘못을 시인하면 할복으로 용서를 받아야 해서 그런가? 너무 비약적인 해석인가? 왜 그들은 Repent 하고 Reconcile 하려 하지 않을까? 물론 상당수 정상적인 일본인들은 용서와 화해를 구한다. 자신이 아닌 선조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현역도 아니었고 9개월짜리 민주당 반짝 총리 이력을 가졌을 뿐 대표성이 없었다. 일본을 줄곧 장악하고 있는 일당은 자민당이고 이들은 과거의 사과를 뒤집고 극우의 보폭을 키우며 행진하고 있다.
참고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다. 바로 공산당이다.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 현장에서 인민재판으로 즉결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일까?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5년간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다.)
Reconciliation(화해)의 전제 조건은 Repent(회개)이다. 이것은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기본적 논리 회로이다. 인간이 원숭이나 강아지와 다른 점이다. 인간만이 역사를 기록한다. 기록하기 때문에 critical distance가 생기고 객관화가 이뤄진다. 그래서 과거를 잊지 않고 뉘우칠 수 있다.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 아니라 피해자의 마음이다. 화해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 완성하는 것이다. 화해가 완성될 때까지, 그 기록이 잊히지 않게, 그들이 부정할 때마다 끊임없이 기록을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뉴라이트가 원하는 것이 바로 '없던 일로 하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만둘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피로감이 몰려오지만 그렇다고 중일마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