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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Mar 24. 2022

스물다섯, 스물일곱

대학원생이라는 정체성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구독해온 유튜브 채널 중에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운영하는 채널이 있다. 이 여성의 이름은 Jenn Im이고 한국 이름은 임도희이다. 나는 거의 10년간 그녀의 채널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그런 그녀가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의 존재를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녀는 상냥하고 친절한 가상의(?) 사촌 언니이자 인생 선배이다. 그녀는 몇 개월 전 서른 살이 되고 난 후 20대를 회고하며 10년간 배운 것들에 대한 영상을 만들어서 올렸는데, 이에 영감을 받아 나도 지난 7년 (만 나이로 따지면 5년이겠다) 간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제 만 나이로는 스물다섯, 한국 나이로는 스물일곱이고, 직업은 대학원생이다.

성인이 되어 계속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학생과 어른, 학교와 사회라는 정체성과 공간 속 어디인가에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입지를 다지는 행위란 추상적이며 구체적이다. 내 앞가림을 하고 내 커리어를 구상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동시에 내가 서 있을 땅을 모색하고 내가 친숙히 느끼는 공간과 행동의 범위 (comfort zone)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내가 시카고에 온 이후로 여러 동네의 카페며 서점을 탐방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20대 초반에는 아직 학생이라는 자각이 강했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이룬 지금은 사회인이라는 자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학교라는 체제 안에 내 삶을 나 스스로가 가두지 않도록 내가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야 한다. 조금은 강박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고, 콘서트에 가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나에게는 연구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삶”을 살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다. 동시에 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삶과 삶의 방식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많은 형태의 서사에 탐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사람에게 자율성이란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조금씩 깨우쳐 나가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사람마다 아주 다르리라 생각한다. 당장 내 동생만 봐도 나와는 사뭇 다르다. 

사실 나는 아직도 깨우치는 중이다. 아니, 이런 것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니! 이제야 <데미안>의 구절이 와닿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어린 시절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더 이상 못 해 먹겠어!”라는 생각과 약간의 분노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분노가 내 안의 신중하지만 소심한 자아를 마비시킨 대가로 나는 추진력을 얻었다. 아마 지난 2년이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불도저처럼 살았던 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노라는 건 자기 자신도 태우는 무척 강력한 감정이라 오랫동안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분노는 차차 사그라들며 용서와 관용, 한층 깊어진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리고 자기 확신이라는 재를 남겼다. 


30대가 되면 20대의 세계를 파괴하게 될까? 그때의 나는 또 무엇인가에 분노하게 될까? 글쎄.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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