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발견#17. 정체성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역할이 사라지면 나는 사라지는 걸까?

by 이숙영

엄마, 아내, 직장인, 팀장, 선배 등 우리의 역할을 내려놓는 순간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낯섦입니다.

“이제 나는 누구지?”

누군가는 우울로, 누군가는 짜증으로, 누군가는 과도한 소비나 여행으로 그 공백을 덮으려 합니다.

하지만 덮는다고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역할은 옷과 비슷합니다. 필요할 때 입고, 상황이 바뀌면 갈아입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어서 옷과 자신을 동일시해 버렸다는 겁니다. 옷을 벗으면 춥고 어색합니다. 거울 속의 모습이 낯설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 옷을 급히 찾습니다. 자격증을 따거나,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거나, 과도한 봉사활동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싶은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빅터 프랭클

*사진출처: 『말이 통해야 일이 통한다』 박재연 지음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극한의 수용소 경험 속에서도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역할은 변합니다. 직함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는 여전히 나의 선택입니다. 정체성은 역할이나 직함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선택에서 만들어집니다.


정체성은 경험을 다시 정리하고 내면의 두려움을 인정하면서 서서히 만들어집니다. 글로 쓰면 구조가 생겨 보다 명확해지는데,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은 점점 단단해집니다.

(“글로 쓰면 구조가 생긴다”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리는데, 현실적인 사례를 들어 다음 편에 소개하겠습니다.)

젊을 때의 도전은 늘 계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력, 평판, 승진, 자녀 교육, 주택 대출 등 지켜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년 이후는 다릅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이미 많은 것을 겪었습니다. 실패해도 인생 전체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솔직한 도전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중년 이후는 가장 솔직하게, 가장 나답게 다시 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처음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둘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해야 하는 것’을 먼저 배웠지, ‘원하는 것’을 묻는 훈련은 거의 배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다시 설계합시다.

진정한 나와의 만남을 시도해 봅시다.

아직 발휘되지 못한 나의 잠재력을 찾아봅시다.

서로가 지치지 않도록 지지하고 응원하는 개성화의 도반이 됩시다.


융 심리학에서는 개성화의 욕구가 더 커지는 시기를 중년 이후로 봅니다. 왜냐하면 중년까지는, 특히 사십 대 초반 정도까지는 사람들이 사회화를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루거나, 자신의 직업에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거나,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사회화인데, 그런 노력 속에서는 개성을 향해 매진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간 후에는 개성화를 향한 자기실현의 욕구가 발현합니다. 자아실현과 자기실현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융 심리학에는 자아실현을 사회화와 동일한 개념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괜찮은 삶을 사는 것, 대세나 유행에 따라 살면서 성공하는 것을 사회화라고 말합니다.

개성화는 그와 다릅니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길을 가는 것, 수많은 사람이 내게 악성 댓글을 달아도 나만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것이 개성화입니다. 그래서 자아실현보다는 자기실현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에고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는 셀프의 꿈을 이루는 것이 훨씬 어렵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데미안 프로젝트』중에서, 정여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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