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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미정 Sep 12. 2023

부들부들

살림의 꾸밈말 6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오직 햇살의 재롱이었고, 나의 고른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구름의 향연뿐이었다. 그런 평온한 날들 속에서 출근을 하자마자 갑작스러운 장례 소식을 들었다.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버스, 지하철, 기차로는 갈 길이 없는 타향에서 그리 실감 나지 않는 소식이었다. 엄마에게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 내 책상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나에게 경악하면서. 그때였다. 옆자리의 선임이 나에게 업무 수정 지시를 내렸는데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당황스러워서 바로 몸을 돌렸고 내 자리의 컴퓨터 화면을 향해 돌아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때야 내 몸이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들부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길로 선임에게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방금 전의 결례에 놀라셨다면 너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선임은 나를 다독이며 조퇴를 권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내 정말 잘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그락 불그락 눈물이 차오른 내 얼굴은 분명 나를 마주해야 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도움은커녕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의 방해만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텅 빈 집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외로움이 차올랐다. 그래서였을까? 계좌이체를 하고 몇몇 가까운 지인에게 전화를 돌려 부고 소식을 알리는 등의 사람 도리를 가까스로 마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설거지 더미를 정리하고 집을 쓸고 닦고, 닦은 식탁을 닦고 또 닦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나는 그것들을 마구 헝클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돈가스. 해머로 고기를 다지고 적당한 소금 후추 간을 맞춘 뒤 냉장고에서 잠시 절이는 동안에는 남은 고기를 정사각형으로 줄지어 썰어 넣고 카레를 끓였다. 그러고도 남은 돼지고기는 제육볶음 양념에 무쳤다. 이번에는 양념이 배는 동안 기다릴 재간이 없어 흐르는 물에 씻은 콩나물을 깔고 양념에 버무려진 고기를 얻고 뚜껑을 덮었다. 냄비 안에 김이 차오르자 뚜껑이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깨까지 차오른 설움이 입으로 코로 눈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창을 목놓아 불러보고 싶었다는 할머니의 꿈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한여름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옷을 입고 대나무 장판 위에 누워계신 할머니의 가슴팍에 파고드는 것은 방과 후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사람의 심장소리가 포근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팔베개까지 차지하면 나는 늘 옛날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할머니의 단골 이야기는 임당수에 빠진 효녀 심청이었는데 할머니의 손장단에 맞춰 이끌려 나오는 이야기 전개는 늘 흥미로웠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구절은 '사-치기 사-치기 사파포'인데 그 구성진 가락은 아무리 흉내를 내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런 못난 내가 음악을 전공할 수 있도록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나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오늘, 나는 온전하지 못하다. 적어도 유년기의 한 부분이 와장창 무너진 것 같다.


따다다 다- 속절없이 울리는 알람에 하교하는 아들을 데리러 나섰다. 집에 와서는 못다 한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돕기로 했다. 밀가루, 계란, 빵가루 중 아들 차지는 밀가루였다. 뽀얀 가루를 만지던 아들이 그런다. 

밀가루가 부들부들해    

응? 부들부들? 그 말이 부드럽다와 보드랍다의 그 중간 어딘가 존재하는 말이기도 하구나. 밀가루가 내 머리카락처럼 부들부들하다는 아들의 표현에 짧은 생각이 스쳤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던 나는 자연스러운 슬픔의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려던 고집 불통의 마음을 가졌었구나. 부들부들한 부들부들 상태가 되어야 할머니를 제대로 보내드리겠구나' 하고 말이다. 아직 나는 슬픔과 미움과, 서러움과 섭섭함과, 이기적임과 추앙함이 뒤섞여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다. 살살 분지르고 톡톡 쳐서 체에 한번 걸려내져야 하는 순수한 슬픔을 기다리면서. 세월에 갈리고 현실에 걸려 부들부들한 부들부들을 향해가는 삶의 한편에 나의 할머니를 소중히 모셔야지. 내 맘속 할머니의 자리를 찾아드려야지. 


슬픔을 달래준 요리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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