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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Jun 15. 2022

패들보드

바다 위의 작은 안식처

여수에 사도라는 섬이 있다. 공룡발자국이 많은 섬으로 유명하다. 아마 중학교 소풍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곳 해변가를 친구들과 걸어가면서 발견한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좌초한 스티로폼 단열재 판을 바다에 띄워 그 위에 올라탔다. 동력이 없다 보니 주위에 널려있던 길고 튼실한 대나무 가지 한 개를 들고 단열재 판에 다시 올라섰다. 대나무 가지로 속이 훤히 비치는 푸른 물빛 속 적당한 곳을 찔러서 밀면 잔잔한 물결 위로 스르륵 나아간다. 옷이 많이 젖을 정도로 신나게 탔던 추억 속 스티로폼 판과 대나무 가지가 내가 생각하는 패들보드에 대한 원형이다.

패들보드는 해양스포츠 장비이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에서도 서핑보드를 타기 위해서 노를 첨가한 것이 이 패들보드이다. SUP라고도 하는데 일어서서(Stand Up) 타는 패들보드의 약자다. 우연히 회사 선배가 부산 광안리에서 타자고 했는데 결국은 타지 못해서 검색해봤더니 바다가 친숙한 나에게는 너무나 타보고 싶은 흥미로운 물건이었다. 동시에 사도에서의 추억도 생각났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바다와 떨어진 내륙에 살고 있어서 바다를 접할 기회가 적다. 아내는 패들보드가 위험해 보여서 구매를 극구 반대했다. 아내 설득을 포기하고 매물을 검색하던 중에 너무나 원했던 모델을 몰래 구입했다. 원하던 모델이라 무성의한 판매자의 태도도 감수하고 무조건 사고자 했다. 결국 샀고, 잠시 동생집에 보관했다가 아내에게 구매 사실을 선포하고 잔소리를 좀 듣고 집으로 들여왔다.

안전조끼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매달아 좋아하는 팝송을 크게 틀고 패들보드에 앉아 노를 저어 카약처럼 나아가면서 맞는 청량한 바닷바람은 나에게 힐링이요 소확행이다. 카약은 내내 앉아있어야 하지만 패들보드는 앉아서 타기도 하고 서서 탈 수도 있다. 게다가 누울 수도 있다. 바다를 다층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노를 젓다 지쳐 패들보드 위에 그대로 누워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흐르는 것인지 구름이 흐르고 있는지 모를 정도다.

패들보드의 또 다른 매력은 노를 저으면서 기암절벽을 수면의 높이에서 위로 올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멋있게 조각된 갯바위가 대자연의 장엄함 그대로 다가온다. 그뿐인가. 원하면 노를 저어 가까이 가볼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여정 중에 해식 동굴을 만나 깊숙이 들어가 보기도 한다. 그런 희귀하고 짜릿한 경험은 일상의 진부함을 깨고 가슴을 뛰게 한다. 하루를 마치고 눈감기 전 오늘은 참 대단한 날이었다고 자부하면서 잘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다 수중 왕국에 들어가는 꿈을 꾼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물 때가 맞지 않아 조류가 위험해 보여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철수한 적도 있고, 누런 뻘이 섞인 바닷물에 실망해서 기대가 반으로 꺾인 적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패들보드 타기 최적의 조건은 일단 만조 시간대에 바람이 잔잔해 파도가 치지 않아야 한다. 날씨도 따뜻해야 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바닥이 보일 정도로 바닷물이 파랗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갯바위가 밋밋하지 않고 거칠고 대범하게 침식되어야 패들보드 위에서 하는 관람행위의 맛이 배가된다. 앞으로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해안가를 찾아 둘러볼 계획이다.

언젠가 아들이 조금 더 크고 바다수영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같이 패들보드를 타고 기암괴석도 느긋하게 감상하고 배낭을 패들보드에 묶어 육지와 가까운 무인도나 무인 해변에서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캠핑을 하는 것이 꿈이다. 떠밀려온 마른 나뭇가지를 가져다 불을 피워 라면을 끓여먹고 싶다. 고생스러움 뒤에 먹는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다. 언젠가 아들도 장성하여 그때를 기억해준다면 아빠로서 좋지 않을까.

그러나 역시 불빛 없는 암흑천지에서 자는 것은 무섭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 육지로 귀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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